블로그 이미지
'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목운

공지사항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의식의 정화방법

2019.07.25 08:03 | Posted by 목운

355쪽부터 380쪽까지는 어떻게 의식을 정화시킬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우주의식과 신의식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는데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제 경우 동양 영성에서 무극과 태극, 그리고 음양의 작동 원리에 해당한다고 느꼈습니다. 실천적으로 보다 중요한 말씀은 "창조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주의식의 본질과 품성이 찬란히 빛나는 환희와 충만과 행복임을 이해하고 그러한 영광스러운 초월적 존재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열망"(358쪽)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열망이 깊고 큰 것이기에 세상에서 보거나 배운 그 무엇에도 우리는 만족을 못하며 마침내 우리를 존재하게 한 신 의식에 접속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명상을 통해서 '신성한 평형상태'를 잠깐이라도 느낌으로써 공허감을 극복하게 된다(359쪽)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 길을 가지 않았을 때 제 경우는 밖에서 몰입거리와 과시거리를 찾아나서고 또 투명성에 벗어난 즐거움을 추구하느라 소위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경우에도 공허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직 소아 망실 내지 멸각, 다른 말로 의식의 정화(이것은 또 마태복음 16:24의 실천입니다)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Comment

첨단 영성으로서의 '편지'

2019.07.05 07:06 | Posted by 목운

세포는 세포막을 통해서 오직 선별된 영양소만을 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인다. 세포는 적합한 영양소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잘 활용한 후에는 투과성 있는 세포막을 통해서 그 찌꺼기를 내보내어 제거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순전히 물리적인 세포막이 어떻게 자신의 건강을 향상시킬 적절한 영양소를 식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지 그리고 불필요한 독성물질에 대한 식별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지 너희는 자문해봐야 한다. 이 모든 작용 속에 고도의 목적성이 보이지 않는가? 이 목적성이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너희는 믿을 수 있는가? (287쪽)

-- 위 문구의 앞뒤에서 편지는 우연히 화학작용을 통해 생명을 얻은 세포가 자가 증식을 해서 진화했다고 하는 과학과 하느님이 화학반응의 조합을 일으켜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고 하는 소위 선지자들은 모두 양극단의 생각이라고 지적합니다. 제 경우 저 세포막에 대한 설명이 가장 인상 깊은 구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물질의 근본 입자와 그 운동인 전자기파, 그리고 세포에서까지 발견되는 의식으로 창조와 진화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편지는 가장 첨단을 가는 영성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편지와 유사한 설명 방식이 요즈음은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있어 '더 낫다'는 것이 없다는 것, 편지의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점에서 더욱 첨단적입니다. 

그리고 제가 접해본 그 어떤 안내서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자기 혁신을 하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창조를 할 수 있는지 안내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요약한 핵심 계명인 신애(神愛)와 인인애(隣人愛)야말로 대승불교의 요약이기도 한데 신애란 쉽게 말하면 신성에 '올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지혜와 관점으로 인인애를 실천할 때 비로서 신적 사랑을 세상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신성에 올인하기 위해서 매일 10분 이상을 내어 침묵하며 기도하라는 것이고 '편지' 또는 그에 버금가는 책을 매일 읽으라는 것입니다. 신성에 올인하는 데 있어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이제까지 잠재의식 깊이 입력되어 습(習)이 된 모든 것을 지워내는 것입니다.  

Comment

긍정적 사고방식에 대한 가르침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사실이지만 영적으로 진화해가는 구도자에게는 그런 정도의 의식 변화로는 영적인 메마름이 해소되지 않아서 자꾸 뭔가를 더 갈망하게 만든다. 영혼이 갈망하는 그 '무언가 더'는 <존재의 근원>과의 진정한 만남과 재합일이다... 

우주적 존재의 본성을 깨닫고 그것과 진정한 만남을 이루는 일에 주의를 돌리면 너희는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우주를 지탱하는 실재로부터 뒷받침받고 있는 자신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그것과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저러한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는 너희 <존재의 근원>과 진정한 만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 존재의 근원과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은 (1) 너희가 의식으로부터 거친 인간적 에고 욕구를 충분히 닦아내고 (2) 일정 시간 이상 명상을 하여 영을 접함으로써 존재를 새롭게 충전시키도록 애쓰면서 근원에 '가 닿기를' 의식 속의 강렬한 느낌으로 규칙적으로 염원할 때만 경험된다. (275~276쪽)

-- 우리의 욕망은 영혼의 갈망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영원을 향하지 않으면 가시 세계의 것들에 갇혀서 루프를 끝없이 반복할 뿐입니다. 그것은 권태와 무미건조함을 느끼는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과 만날 때만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3세기 사람 플로티누스가 '인간적 고독에서 신적 고독으로의 비상(flight of the alone to the Alone)'을 말할 때 전해지던 것입니다. 신과 함께할 때 다른 이들에게는 혼자인 것 같지만 완전히 또 진실로 인간적 고독을 극복한 상태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가는 비결은 위 (1) (2)밖에 없다는 것은 수천 년에 걸쳐 입증된 진실입니다.   

Comment

너희는 너희가 하느님이라 부르고 내가 우주적 존재라고 일컫는 <그것>에에는 많은 종교들이 덧붙여놓은 인간적 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온전하고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분노와 위협, 처벌 등 인간적 속겅은 오직 인간의 상황에만 어울리는 것이다...

죽음은 존재의 한정된 차원으로부터 더 밝고 더 강력한 차원으로 넘어가는 행복한 여행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영적으로 어느 정도 정화되어 육신의 껍질을 벗어날 때가 되면 너희는 이곳을 떠나서 육체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사랑과 아름다움과 경이로운 존재감을 누리는 세계로 진입할 것이다. (274쪽)

-- 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어머니 따라 그리스도교에 입문했습니다.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입력된 하느님은 인간과 비슷한 것이었고 게다가 마지막 날에 단호한 심판으로 천국, 연옥 아니면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관이었습니다(다행히 가톨릭에 입문해서 연옥의 가능성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교회 출석을 그만두고 읽은 책들은 한결같이 신에게 인간적 속성은 없으며 절대 심판관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선가귀감에서 신적 존재를 한 물건(一物)이라고 하여 '편지'에서 자주 <그것(It)>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시대적으로 부족 의식 수준의 종교도 존재하는 반면 아무리 고등 의식으로 된 종교라도 우리 의식이 높아지지 않으면 부족 의식 수준의 종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임사체험자들이나 높은 의식에 도달한 스승들 얘기를 들으면 이 세상이 너무 누추해서 별로 이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보이는 세상만을 기준으로 살고 있습니다. 호킨스 박사도 의식이 <무조건적 사랑>을 넘어 <평화>의 수준에 이르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선택에 무심해진다고 합니다.

Comment

기독교란 내 초기 제자들과 안티옥 수임 이후의 바울이 유대인들을 최대한 한데 뭉치게 하고 이방의 개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종교다... 너희 영적 발전은 오로지 존재의 법칙과 <너희를 존재하게 한 그것>에 대한 한층 더 깊은 인식과 이해로부터만 일어날 수 있다.

인류는 자신의 영적 근원을 알지 못함으로 해서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고 인간 의식을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온갖 고난을 낳는 근원인 지상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희가 배운, 혹은 전통이 전해준 그릇된 믿음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실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을 쌓을 수 있도록 <존재의 진실>을 이해가능한 현대 언어로 너희에게 전하기 위해 <내 그리스도 의식을 온통 쏟아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편지, 270~271쪽)

-- 저처럼 소년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신 분들은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 영향력이 압도적이어서 오히려 종교로 인한 깊은 고난과 좌절의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위에 써 있는 대로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초기 교회 다음엔 로마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 이후 로마제국 통치의 하위 수단, 즉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위에 써 있는 대로 '편지'의 기본 태도는 과학적입니다. 인류 고통의 원인인 전쟁(기록된 역사의 약 93% 이상이 전쟁의 역사이며 전쟁이 없었을 때는 페스트와 같은 전쟁에 버금가는 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닫고 영적 발전을 꾀함으로써 모든 창조의 근원인 집단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매우 합리적인 하화중생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Comment

어제 글은 매일 명상을 위해 바치는 기도와 지상 천국 회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보면 (1)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2) 치유와 해결을 필요로 하는 모든 치유와 문제 해결이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이미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아는 것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저는 환갑 넘는 삶을 살면서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채워졌음'을 압니다. 제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채워진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다음에 지금 순간까지 적절한 때에 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필요한 치유가 일어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부를 잘 해서 내가 이미 신 의식의 일부임을 믿을 필요가 없이, 마치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두말할 필요없이 아는 것처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같은 성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신인 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랑 자체가 되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명상 기도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궁극 목적은 당신을 표현하는 것임을 아나이다"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실천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일거수일투족이 신의 표현이 되도록 사는 것이 바로 인간 삶의 참 목표임을 뼛속 깊이 새기기 위해 매일 정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공부입니다.  

Comment

오직 하나 필요한 것

2019.06.05 07:33 | Posted by 목운

우선 명상기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당신은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 제 가장 숭고한 영감이십니다." 다음에 세부규칙 해설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신 의식과 결합함으로써 치유와 해답을 구하는 모든 문제가 적절히 치유되고 해결될 것임을 안다."

매일 읽고 기도를 바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기도 지향이 오직 신 의식과 합치하고자 하는 데 있고 또 신 의식에 완전한 신뢰가 있다면 따로 구할 게 있습니까? 부자의 정의를 제대로 내린다면, 즉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자'가 부자라고 본다면 우리는 믿는 바대로 이미 부자입니다.

다음에 또 다시 신 의식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걱정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치유와 해답을 구하는 모든 문제가 적절히 치유되고 해결될 것임을 아는데' 당신은 무슨 걱정을 하며 왜 잠을 잘 못 이룹니까? 그리스도 말씀대로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온 마음과 뜻과 목숨을 바쳐 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기존 교회에 의지하는 일이 매우 효과가 없고 간혹 속임수에 휩쓸린다는 자각이 있는 분은 탈교회-탈종교를 추구한다고 봅니다. 루터가 세 가지 '만', 즉 성경, 은총, 믿음만을 주장한 것은 기존 교회가 심하게 부패했을 뿐 아니라 길을 잃고 아무런 효험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정당한 기존 교회는 오늘날 다시 형태만 다른 교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둘이나 셋이 모여서 보다 효과적으로 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신비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인지 모른다는 것이 바른 판단인데 자기네 교회만이 그리스도 신비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입니다.

Comment

아무도 해당 구절을 알려주지 않으시기에 제가 찾았습니다. 일곱 번째 편지 425쪽과 455쪽에서 두 번 거론되고 있습니다. 즉 "영적 버팀목으로서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을 약화시키는 일이므로 나에게 의지하는 것조차도 일시적 수단으로만 여겨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희로 하여금 너희 진정한 후원자이자 대들보인 <생명과 존재의 근원>은 평형상태의 우주의식이라는 전능한 차원에서 직접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기록자를 통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425쪽)"

이것은 바이블 말씀과도 조응합니다. 즉 바이블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 이상을 할 수 있다고 써 있죠! 혹시 해당 구절을 찾아 주실 분 계시나요? 다음에 455쪽에서는 "내 그리스도 의식이 항상 너희와 함께하고 있어서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즉시 나에게로 올 수 있음을 알라. 이것이 너희에게 (의지물이 아니라) 위안이 되게 하라. 나는 너희가 스스로를 계몽시켜 그리스도 의식 속으로 상승해가기 위해 지나가는 관문일 뿐이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교회에 의존하게 하는 방식을 쓰는 대부분의 기성 교회는 (알든 모르든) 교묘한 트릭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스승은 제자가 하루 빨리 독립해서 하산하기를 바라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볼 때는 죽음이라는 완전 혼자인 과업을 치루기 위해서라도 교회나 성직자에게 의존하는 일을 빨리 벗어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재론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살불살조를 말하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

  1. 지나감 2019.06.12 10:45

    바이블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한복음 14장 12절-

미디어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어 외양에 치중하여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아름다운 곳, 재미있는 곳, 유익한 곳, 특별히 맛있는 곳을 계속 보여주지요!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정신의 자유를 얻는 데도 도움을 줄지 몰라도 결국 상업주의에 매몰되지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여행을 다룹니다. 저는 가장 비천한 메신저에 불과하지만 참 좋은 텍스트 '편지'를 만나 함께한다는 목적에서 이곳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어제는 규칙 1번 "우선 10분부터 시작해서 매일 명상을 하여 만족할 만큼의 시간까지 늘려가겠다."는 바에 따라 10분을 늘려 타이머를 40분에 맞추고 명상을 했는데 진짜 눈 깜짝하는 것처럼 지나가더군요. 명상이 대개는 만족스럽지 않고 헤매다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만에 종일토록 명상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근무했습니다. 물론 헤매는 명상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매일의 선언'(어쩌면 모든 신비주의와 종교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란 생각입니다)이 우리 공부의 요점을 얼마나 잘 요약한 것인지 쓰려다 길어졌습니다.

즉 '선언'은 우리 공부가 '에고 충동이 사라지고 신 의식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이들의 소아가 아름답게 표현되는 천국을 위한 것'이고 우리가 매일 비는 것이 '모든 이들의 의식주 해결뿐 아니라 영적으로 드높여지는 것' 즉 의식이 높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돌아갈 곳이 신적 생명과 신 의식이 불타오르는 근원이라는 것, 그곳은 창조의 근원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링크합니다.

https://tjryu.tistory.com/entry/%EB%A7%A4%EC%9D%BC%EC%9D%98-%EC%84%A0%EC%96%B8?category=539916

 

'그리스도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직 하나 필요한 것  (0) 2019.06.05
그리스도도 일시적 수단임  (2) 2019.06.02
매일의 선언과 공부의 요점  (0) 2019.05.17
진정한 이상, 최고의 목표  (0) 2019.05.13
존재상태로서의 하느님 나라  (0) 2019.03.16
공부의 요지  (0) 2019.01.18

Comment

진정한 이상, 최고의 목표

2019.05.13 05:14 | Posted by 목운

너희 물질세계 장막 너머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적 의식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만유에 저마다 존재를 부여하는, 만유의 배후와 만유의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상이요 진정한 열망이요 최고의 목표다.

너희는 이 실재를 신이든 알라든 야훼든 무한자든 지성이든 신성한 마음이든 신 의식이든 도(道)든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이 모든 이름들이 너희 <존재의 근원>, 즉 <창조의 기원>을 뜻한다. 이보다 더 높은 열망을 품을 수는 없다. 모든 개체적 존재를 있게 하고 돌보아 존속하게 하는, 만유의 배후와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 말이다. (그리스도의 편지, 231쪽)

-- 기본적으로 존재의 근원 또는 창조의 기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을 최고의 지성들은 오래 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종교가 붙인 이름만이 거룩하고 올바르다는 것부터 오류임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종교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탈종교의 시대입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실재를 체험함으로써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일원적(비이원적) 인식을 얻고 사랑 자체를 체험함으로써 저절로 완벽히 진실해지고 완벽히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 하향식 실천이지 싶습니다. 계명 하나하나를 지켜 언젠가는 신을 체험하겠지 하는 상향식 실천은 오히려 힘겹고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히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겠다는 결의와 매일 성찰하고 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만나는 모든 이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겠다는 결의가 더 쉬웠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 결론은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 거기서 결사적으로 벗어나겠다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