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정복성

7장 5

목운 2015. 3. 11. 11:39

우리는 생각하려는 욕망을 신께 바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솟아나옵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생존하려는 의지를 신께 바쳐야 합니다. 생각하기를 그치면 분별이 없어질까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신적> 백치"나 "<신적> 우둔"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실로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저절로 드러납니다. 즉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총체적 이해로 드러납니다.

 <무한한 실체>란 전지(全知)하며 말과 생각 그리고 언어의 구사와 관계없습니다. 자기애로 가득한 에고는 말하기에 중독돼 있습니다. 그것은 참나에게는 무가치한 일입니다. 에고(마음)는, 생각하기(느끼기)를 그치면 독자적인 소아가 죽으리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에고의 생존 시스템에서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침묵과 고요를 두려워하고 기피합니다. 에고(소아)는 선형적이고 단속적이고 분리되고 정의할 수 있는 것, 즉 내용물과 동일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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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떤 수준에 이르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압니다. 그때 에고는 세세하게 정의(定義)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참나는 그런 책략으로 바보 취급당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모든 활동을 신께 바치려는 지향에 의해서 모든 잘못된 동일시가 일순간에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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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신께 이르는 길은 심장(사랑, 봉헌, 무주상 보시, 순명, 공경, 찬미)을 통하거나 마음('아드바이타', 즉 비이원성의 길)을 통하여 왔습니다. 각 노선은 한 단계나 다른 단계에서 더 편안하게 보이거나 강조점이 서로 바뀌거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하거나 깨닫게 되는 개별적 자아나 "나" 또는 에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장애물입니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에고나 "나"라고 하는 무엇은 없다고 아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에고가 아니라 의식의 비독자적인 측면이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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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가 "나"라고 하는 중추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삶의 근원이라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마치 삶 자체를 신께 바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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