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과 영혼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가? 치유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영혼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몸이 그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그 자체에는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팔은 자신이 팔임을 체험할 수 없으며, 다리는 자신이 다리임을 체험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몸의 감각들과 그것이 공간 안에 있음을 체험할 뿐이다. 정말로 기묘하게도 감각들 또한 그들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보다 더 큰 무엇 안에서 체험되어져야 하는데 마음이 그것이다. 감각들의 경험과 그들이 몸에 대하여 보고하는 것은 실제로는 마음 안에서 경험된다.
마찬가지로 놀랍겠지만, 마음 또한 그 자신을 체험할 수 없다. 생각은 그 자신의 생각임을 체험할 수 없으며, 느낌은 그 자신의 느낌임을 체험할 수 없고, 기억 또한 자신의 기억임을 체험할 수 없다. 그 모두가 마음보다 더 큰 무엇 안에서 체험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의식 덕분이다. 이것이 마취요법의 토대를 이루는 것인데 마취란 의식을 제거함으로써 마음과 몸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의식 자체는 자각(awareness)이라 불리는 무한한 에너지 장 안에서 경험되어진다. 자각 때문에, 우리는 의식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알며, 의식 때문에 우리는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알고, 마음 때문에 우리는 몸에 대해서 보고되는 감각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말로 몇몇의 단계들이 몸으로부터 제거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몸이 아니라는 것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란 의식의 무한한 장 안에서 자각하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며, 명상 안에서도 자신이 실체의 모든 단계들을 알아차리는 '그것'이라는 사실을 비교적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치유의 기본적인 원리는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음이란 매우 강력해서 그것이 믿는 바를 드러내 보이는 경향이 있다.
몸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의 결과이다.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이란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며, 우리가 믿는 바를 이야기해주는 그것의 행동양식을 관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억을 돌이켜 보려 한다면, 우리는 종종 우리가 지녔던 어떤 류의 신념 체계나 우리가 생각하려 했던 것을 기억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개인 또는 집단 무의식의 어딘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일들의 가장 일반적인 예는 알레르기 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글쎄요, 저는 알레르기에 대해 어떤 신념도 없어요. 제 삶에 의식적으로 이것을 가져오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본다면, 거의 일정하게도 그러한 신념 체계와 알레르기들이 삶에서 매우 초창기에 발생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대개 2살 혹은 3살에서이다. 어린 아이는 "알레르기들이 우리 가족 안에서 퍼졌다"와 같이 가족으로부터 누군가의 발언을 듣게 된다. 아이의 마음이 이를 듣는 순간부터, 그것을 승인함은 물론 믿게 되며, 영향을 끼치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린다.
마음에 있는 생각의 패턴들은 신념체계들이다. 죄책감은 판단주의나 부정적인 의견들로부터 유래된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한데 더불어 가는 경향이 있기에,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질병과 자만심을 포함해서, 화, 욕망, 두려움, 슬픔, 무감정, 그리고 죄책감들에 이바지한다.
의식 지도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질병을 초래하며, 긍정적인 감정은 모두 질병의 치료에 기여하는 것을 보여준다. 진실의 단계인 용기 수준으로 일단 진입하게 되면, 우리는 초연해지게 되는데 자발적이고도 수용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로의 길이 열린다. 의식의 척도에서 사랑은 500에서 발생하며 치유는 540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사랑(lovingness)이 거의 자동적으로 몸 안에서 치유를 가져오는 것일까? 그것은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으로 무비판적이고도 용서하며 이해와 연민에 맞추어져 있다. 사랑은 이해하고, 길러내며 모든 생명을 지지해주고 신성함 자체로 경이로우며, 그 스스로 540 수준의 치유하는 에너지 장을 창조해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수준의 사랑의 삶으로, 즉 치유하는 삶으로의 이행이 촉진될 수 있는가?)
(실용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감각들에 저항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과 그것에 꼬리표를 붙이는 것을 그만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례로, 우리는 '십이지장 궤양'이나 혹은 '천식'을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은 이름지어진 것이며, 정신적인 구조물들이고, 정교한 프로그램들이면서도 신념체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식'을 경험할 수 없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근본적 진실의 기법이 생겨나는 곳이다.
질병의 신체적 특징에서 실제적인 치유는 정신적인 꼬리표를 붙이지 않고 내적으로 육체적인 경험에 저항함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실 우리는 정신적인 꼬리표를 취소하고 그것을 진실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그것에 영향 받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영향받을 뿐이다."와 같은 단언을 통해 취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한한 존재이며 그것에 영향받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념 체계로 인해 제한되어져 있다는 것이기에, 만일 그것들을 내려놓는다면 무엇이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일까? 모습(form)이 의식으로부터 제거되면 과연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모습 없음(formless)이 남으며, 그 내적인 체험은 무한하고도 경계가 없으며 시작이나 마침 또한 없다. 모습 없음은 의식 자체의 근본적인 본질이며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한계를 긋거나 무의식적으로 모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자신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하 내용 : 근육테스트를 통해 위에서 언급한 단언해야 할 진술들로 취소 작업을 할 때 사람은 강해짐)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거짓인 것을 진실인 것으로 대체할 때, 치유가 발생한다고 하겠다.
특정한 병을 치유하는 특성들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1) 그것의 감각적인 경험에 저항하기를 내려놓기
2) 더 이상 이름을 단다거나 그것에 꼬리표를 붙이지 않기
3) 어떠한 단어들도 사용하지 않으며, 매우 기꺼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
4) 그와 동시에 생각의 틀이나 신념체계를 취소하기
5) 치유를 일으키는 사랑의 에너지 장을 선택하기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선택하면 뇌에서 엔돌핀이 분비되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는 몸의 건강과 행복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행복은 부정적인 것을 내려놓고 그것을 의식 안에서 사랑으로 바꾸기를 허용하는 자발성(willingness)으로부터 기인하는데, 의식의 근본적인 본질은 그것이 변함없는 자비(lovingness)이기 때문이다.
(HEALING AND RECOVERY, ASSISTING HEALING : p 43 - p5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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