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종교 무용론

목운 2020. 5. 26. 06:21

앞 글을 뒷받침해주는 종교학자 길희성 님의 주장을 가져옵니다.

"1. 언제부터인가 종교에서 ‘영성’이 빠져버렸다. 그 자리를 종교의 제도와 조직이 대신했다.

2.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요즘은 교회에서 누구도 ‘마음의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지구촌에서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3. 기복신앙은 세속적 복락을 추구한다. 세속적 복락은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4.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4/29. 중앙일보)"

덧붙이자면 오늘날 종교의 효용보다 부작용이 더 커졌음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종교는 구성원들이 생각하는(또는 착각하는) 사적 이익이나 공동목표를 위한 결사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제가 그쪽은 과문하지만 루터가 처음 생각한 것은 제사장을 자임하는 교회 조직 없이 직접 신과 소통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비주의의 길이자 위 인용에 있는 영성의 길입니다.

관련해서 명상의 효용을 강조한 글 두 개를 인용합니다.

"명상할 때 신에게 열려 있는 문을 어디에서나 만나게 된다. 신과 교감할 때 세상의 어떤 재앙도 신적 기쁨과 평화를 빼앗지 못한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깊은 앎, 참된 기쁨, 내면의 평화를 위해 매일 명상하는 것보다 효과적이고 유용한 수단은 거의 없다. 당신은 매일 명상하는가? (닐 도널드 월시)"

성리학을 너무 간단히 무용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 실상 제대로 된 성리학자는 대인 또는 성인의 특징을 표상한, 그래서 에고가 소멸된 상태인 갓난 아이처럼 되기 위해 매일 정좌를 실천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정은해 님 유교명상론 참조).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팬데믹과 멸종 저항(1)  (0) 2020.06.06
내려놓기와 순명하기  (0) 2020.06.02
신비주의와 제도종교의 종말  (0) 2020.05.25
사람들 속에서의 공부  (0) 2020.05.17
신비주의와 그리스도인  (0) 2020.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