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심령(psyche)과 도심(道心)

목운 2021. 4. 10. 14:49

“영혼은 심령의 중개를 통해서 ‘신적 실체‘이기도 한 ’신적 사랑‘을 세속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며 ’존재의 근원‘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열망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심령은 마침내 ’신적 실체‘ 앞에 에고 의식의 욕망을 내맡기고 에고를 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즉 자아의 죽음을 겪게 해달라고 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실로 영적 삶의 정점에 다가갈 때 일어나며 대개는 그 과정을 이끌어줄 영적 스승을 필요로 한다. 이 자아의 죽음은 더 큰 영적 통찰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져서는 결코 안 된다.” (448쪽)

책은 영혼과 에고 사이에 존재하는 심령에 대해 437쪽부터 10여 쪽에 결쳐 논합니다. 아마도 불교의 유식론과 칼 융의 심리학에 조예가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로서는 그저 인간의 의지와 직감이 나오는 곳이지 않나 합니다. 책은 “인간 의식의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하고 영혼에서 의식을 끌어내며, 옳고 그름을 아는 우리 안의 숨겨진 본능”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에고를 재론하면 그것은 모든 생명체 속에서 몸의 생존에 기여하는 ‘지상의 의식’만이 나오는 자리로서 영혼, 즉 신적 실체와는 어떤 형태로도 닮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동아시아에서 이미 에고와 심령을 구분해서 말한 바가 있지 싶습니다. 즉 논어가 결론 삼아 마지막 장에서 거론한 것이 바로 내면의 중심을 잡으라는 것(允執其中)인데 이 말씀의 연원은 서경 대우모의 16자 심법입니다.

​옮겨보면 “사람 마음은 위태롭고 도에서 나온 마음은 희미하니 오직 하나에 마음을 모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도에서 나온 마음’을 바로 현대 동서 영성이 공통으로 말하는 ‘신 의식’의 개체화이기도 한 영혼의 소리를 중개하는 심령으로 보면 어떻겠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 책에서 전하는 다음 말씀과 함께 생각해보면 그다지 무리한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즉 “에고는 심령을 통해 전해지는 영혼의 목소리를 반박하여 물리치고 그렇게 반박할 때마다 그것은 자신의 안전의 유일한 상징인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에 대한 지각 속에 자신을 더욱 깊이 매몰시킨다. (442쪽)”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오래 수양하면 심령은 더욱 영성화하고 진화하면서 예를 들면 “삶이란 이게 다란 말인가?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영혼이 심령에게 존재의 근원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각인시키기 시작한 것이고 심령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에고를 이끌고 ‘존재의 근원’과 재합일하기 위해 진군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우리는 영혼의 제안을 거부하고 지상적 삶만이 유일한 것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음식에서 나오는 에너지에만 의존하게 되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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