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미륵보살송과 동서의 신비주의

목운 2023. 1. 29. 09:04

경허스님의 미륵보살송을 읽고 글재료를 얻는다.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은데 첫째는 불가의 부처와 보살이 기독교의 성부와 성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근거는 선가귀감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속뜻은 무량광, 무량수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에서 받드는 불(佛)은 의식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한 경지에 붙인다고 추정된다.

동시에 보살은 개체성을 가지되 이미 부처와 합일한 인간으로서 최고 의식에 도달한 존재를 말한다고 전제하면 미륵보살송은 성부와 합일한 그리스도께 바치는 기도와 흡사하다. 한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마치 그림자처럼 함께하려고 노력하라."

내 나름으로 다시 써보면 그리스도 의식과 완전히 합일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인 성부와 합일하려는 노력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정수인바 불교도 똑같은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즉 미륵보살과 하나가 됨으로써 동시에 부처의식과 하나 된다는 속뜻을 담은 게 미륵보살송이라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기독교가 신에게서 하사된 교(教)가 아니라 다른 모든 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상향 노력에서 나온 교임을 받아들이면(이것은 제게 개안 수준의 깨달음이었음) 중용이 얘기하는 것처럼 교란 그저 수도를 말하며 도란 솔성이고 성이란 천명이기 때문에 미륵보살송도 결국 천명에 완전히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지향의 발로다.

미륵보살송은 결국 아미타불과 하나되려는 지향이어서 기독교가 그리스도 의식과 하나됨으로써 존재의 근원인 성부와 하나되려는 지향과 같다는 것이 이상의 논의다. 두 번째로 주목코자 하는 것은 그렇게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된 모습을 많은 성인이 각자의 문화와 삶 속에서 구현해서 보여 주었다. 그 상태란 조건 없는 사랑과 전지전능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도교나 힌두교 가르침을 보면 그 경지란 아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무위, 무지, 적자지심 모두 그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마하리지 님과의 대담을 보니 그런 상태를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이런 경지는 자신의 삶, 즉 존재의 모든 것을 신(성부, 존재의 근원과 같은 말임)께 맡기라는 마하리쉬 님 가르침과도 완전히 일치하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결론적으로 동서 모든 신비주의 또는 중용의 교(教)가 지향하는 것은 신인합일이며 그것은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지극한 소망이기도 한데 그 소망을 두 가지 정도로 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위대하게 빛나면서 가장 신적인 것을 표현하는 영원한 진화 과정이고 그 둘은 모든 게 충족되며 당연히 고통과 번뇌가 필요 없어 완전한 자유를 얻은 존재 상태라 할 것이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원과의 합일, 그리고 노후 대책  (0) 2023.02.04
여생의 소망  (0) 2023.02.02
번뇌와 업장의 해결책으로서 깨달음  (2) 2023.01.28
경허스님, 그리고 성인  (0) 2023.01.26
유교의 창조적 재해석  (0) 2023.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