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대학의 길과 여섯 바라밀

목운 2020. 9. 16. 08:14

새벽 2시도 안 되어 모기에 물리는 바람에 잠이 깼습니다. 당직실엔 늘 모기가 있어 모기향을 피웠었는데 아침까지 피우면 연기가 가득 차는 게 우려돼 1/3정도만 피운 게 화근이었습니다. 


금방 반성하기를 오래된 습인 희망에 치우친 비과학적 태도를 고쳐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확인되지 않거나 증거도 없이 별일 없을 것으로 치부하는 습성 말입니다. 살면서 많이 실패하고 주변 사람에게 태클을 자주 받는 것도 이러한 습성 때문이었다는 깨침이 듭니다.

  
어쨌든 좀더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했지만 우리가 겪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최고선을 위해 일어난다는 에크하르트 님의 말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명상하고 더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깨달은 것을 적어볼까 합니다. 즉 커다란 수행의 길, 즉 대학지도는 밝은 덕을 더욱 드러내고(명명덕), 사람을 사랑하며(친민), 최고선을 지향하는(지어지선) 데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불가의 오행(여섯 바라밀과 같습니다)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밝은 덕을 드러낸다는 말은 세상 삶에서 습득한 심생멸을 지워내고 타고난 심진여를 밝힌다는 것인데 여섯 바라밀 가운데 지관, 즉 선정과 지혜에 대응합니다. 다음에 저는 양명의 노선에 따라 신민이 아니라 친민을 택하는데 이는 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응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반드시 보시, 지계, 인욕을 실천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편 무조건적 사랑이기도 한 인(仁)에 도달하려면 정좌와 시중(時中)을 몸에 배도록 해야 하고 그때 비로소 보시, 지계, 인욕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어지선은 언제나 최고선을 지향한다는 것인데 정진바라밀에 해당합니다. 


인도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선불교와, 불교도였던 이고 선생이 개창한 신유학은 강조점만 다를 뿐 실상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론도 가능합니다. 동아시아 사상의 정수를 매일 실천해보면 기독교 또는 서학과도 어긋나는 게 전혀 없습니다. 천진암에서 소그룹으로 학습 모임을 했던 이승훈 님, 이벽 님 등도 그러하셨으리라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대학의 길을 이와 같이 풀면 그리스도의 첫째, 둘째 계명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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