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학이편

2018.09.30 12:16 | Posted by 목운

아시는 대로 학이편은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제 언어로 바꾸어봅니다.

"배워서 습관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게 기쁨이 되는 것은 그것이 존재의 근원에 맞닿은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는 것은 이것이 근본에 이르는 공부이며 그가 내 언어를 이해하기 때문이고, 그런 벗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있는 증거이기에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정(情, 에고)으로 사는 이들에게 모진 대우를 받을 수도 있으나 그로 인해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지향하는 목표가 향상일로한 끝에 군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진 대우를 철저히 받아들임으로써 내 에고가 옅어지고 나는 향상하는 혜택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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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극복과 성리학

2018.09.29 21:55 | Posted by 목운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상투적인 것 또는 통속적인 것이 되며 누구나 자기식으로 다 안다고 생각하여 제한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하나님'이죠! 그래서 명상에도 이름을 붙이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조선 선비로서 경전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은 누구나 명상을 했지만 거기에서 불교적 냄새를 찾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요컨대 혼자 있을 때 근신하는 '신기독'과 희로애락이 나기 전 시공이 끊어진 자리를 지키는 '수기중'은 성리학적 실천의 핵심이기에 중(中)이 바로 '천하지대본'이 된 것입니다.

성리학은 미신과 마구 영합하고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불교 극복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그와 같은 당나라 말기 지성의 노력은 고려말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향하는 의식의 힘은 언제나 내면으로 향하는 의식을 일시적으로 압도하듯 성리학도 세속화하고 이데올로기로 복무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똑같은 코스를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위 초인이면서 인간을 닮은 인격신 '하나님'이란 이름에 모든 병폐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를 극복하는 노력이 영미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가장 강력한 축이 인도에 있고 대표적 인물이 마하리쉬와 마하라지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분발하고 남북한이 통합하여 지구촌에 그 에너지를 떨칠 즈음엔 성리학이 큰 역할을 하리라고 제 개인적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 성리학의 시조로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분이 바로 당말의 이고 선생입니다. 이고 선생은 주렴계에 의해서 거의 복제되었고 주희가 바로 주렴계를 계승 발전시킨 후 성리학이 원나라를 거쳐 고려말 이후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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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구한다고 하면 구할 게 없는데 무엇을 구하냐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가르침에 의하면 중(中)이나 공(空), 또는 성(性)의 자리는 원만구족하여 이미 모든 것이 있는 것으로 믿어집니다. 기독교나 힌두교 영성에서 말하는 신의 자리로 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불교에서도 말이 끊어진 그 자리를 찾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일체를 부정했고 신 의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더 이상 찾을 게 없습니다. 바로 지복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호킨스 박사가 얘기하는 의식지수 600 이상의 상태인데 그때 깨달은 자는 이승과 저승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승에 있는 이유는 주변에서 도움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애덕의 요구에 따라 세상이 요청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론상으로 그렇지 실제로는 그 과정까지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개별 영혼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세상에도 유익을 주는 것 - 이것을 대승에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 보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깨달았지만 세상 일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입전수수(入廛垂手)라고 합니다.

제 생각엔 이때 세상에 도움을 주는 것은 신의 뜻에 일치하며 신의 일을 하기 때문에 여타 필요는 저절로 구족되며 '신에게 녹봉을 받는' 셈입니다. 그 녹봉이란, 의식주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세상의 물질적 만족을 모두 합친 것을 초월한 만족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향상일로' 로 요약되는 대승 보살 사상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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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구하는 공부

2018.09.27 10:30 | Posted by 목운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가 복을 구하는데 왜 잘 안되는 것이며 명료하고 간단한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모든 철학과 종교가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지만 왜 잘 안될까요? 저 자신도 많이 엇나가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을 환갑이 될 무렵 크게 넘어지고 깨달았습니다.

그 답은 홀로 있을 때 근신하고 진실하지 못했고 참마음(中)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참마음을 지켜 거기서 지시하는 대로만 살면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공부하고 그것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생각을 끊고 침묵 속에 머무는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이 일이 몸에 밸 때 신 의식(또는 존재의 근원 또는 부동의 동자)에 일치하게 되며 빈 상태에서 무엇이든 복된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즉 아라비아 우화 속의 '지니'를 얻어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적 지혜와 사랑만으로 살게 되어 그르침 없이, 고통 없이 '바라는 대로 해도 걸림이 없는(從心所欲不踰矩)' 삶을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문제의 치유와 해결을 성취하며 모든 필요가 충족됩니다. 공부를 이것 하나로 꿴다면(一以貫之) 길을 제대로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운동선수나 악기연주가가 언제나 꾸준히 한 가지를 연습하듯 평생 몸에 붙일 일이라고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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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르와 보살 사상

2018.09.16 08:25 | Posted by 목운
유태인 전승으로서 비전적 교훈, 명상법 등 신비적 가르침의 총체를 카발라라고 하며 그 주요 텍스트가 조하르입니다. 조하르는 모세 오경의 주석 형태를 취하는데 성서 짜깁기, 미드라쉬(유태의 훈고학이라 할 수 있음), 중세 설교와 기타 픽션 및 판타지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핵심 주제는 인간과 신적 실체의 상호작용입니다.

조하르에 입문하면서 인상 깊은 두어 가지 적어보려 합니다. 첫째는 조하르 중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열 가지 세피롯이란 무한자의 속성 내지 발현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삼위일체는 신의 세 위(位, persona)가 하나라고 하는 반면 조하르는 십위(十位)가 하나라고 봅니다. 조하르는 이러한 십위가 결국 의식 지도이며 존재의 차원으로 보고 있습니다(Paulist Press 판 Zohar, 1983, 37쪽).

둘째는 위 십위 가운데 최종 단계인 케테르란 '생각이 소멸한 상태'로서 인간 의식이 확장하여 무한자 속으로 사라진다고 보아 선불교에서 말이 끊어지고 마음이 없어지는(言語道斷 心行處滅) 단계에 대한 묘사와 같다는 점입니다. 오늘까지 읽고 파악한 바에 따르면 결국 조하르도 동아시아의 천인합일 또는 서양 신비주의의 신인합일과 같은 목적을 가지는 가르침입니다.

마지막으로 조하르의 핵심 사상은 대승 불교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징벌 대상자를 모두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도 구원받지 않겠다고 한 것은 대승 보살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밖에 공부하면서 발견하는 재미있는 내용을 이곳에서 수시로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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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침묵

2018.09.15 17:53 | Posted by 목운

지관문(또는 명상)을 통해 신인합일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입니다. 지루하고 답은 없이 사막을 가는 심정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이블은 그 길이 '곧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승들 말씀을 읽고 그냥 홀로 있는 시간을 자주 내면서 보시-지계-인욕 등 오행에 몰입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쉬지 않고 자신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예, 미륵존여래불, 아미타불, 그리스도 예수 등)을 계속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아지경과 같은 것을 바랍니다. 무아지경은 필연적으로 오고 갑니다. 인간 뇌가 그런 압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순수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고 길게 늘인 무아지경이라면 우리 뇌는 타버릴 것입니다. 자연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깜빡거리고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맥박, 호흡, 소화, 잠과 깸, 탄생과 죽음 등 모든 것이 파도처럼 왔다가 갑니다. 리듬, 주기, 양극의 조화로운 교대가 법칙입니다. 생명의 이러한 패턴에 저항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불변하는 것을 찾는다면 체험을 넘어 가십시오. 내가 '나다(I AM)!' 하는 것을 언제나 상기하라고 할 때는 그 상태로 되풀이해서 돌아가라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특정한 생각을 하는 것은 마음의 자연스런 상태가 아닙니다. 오직 침묵만이 자연스런 상태입니다. 침묵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침묵 자체 말입니다. 마음이 자연스런 상태에 있을 때 마음은 모든 체험이 지나간 후 고요한 상태로 되돌아 갑니다. 아니 그보다는 침묵을 배경으로 해서 모든 체험이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스리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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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글쓰는 이유

2018.09.14 07:52 | Posted by 목운
결국 삶의 선택은 둘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지금보다 젊었을 때보다 확연해집니다. 하나는 세상에 잘 통하면서 '잘 나가는' 것으로 간주되는 삶이고 또 하나는 세상과 삶을 완전히 이해하고 '세상에 있지만 그저 세상을 가운처럼 걸친 듯' 사는 삶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한 삶과 깨달은 삶입니다.

제가 스승으로 보는 이들은 후자의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일찍부터 그런 삶을 선택하는 상근기 사람이 희귀한 존재인 것도 사실입니다. 보통은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다가 아예 후자에 관심 없이 세상에 몰입하거나 좌절과 고통을 만나 회두하여 깨달음에 관심을 가진다고 봅니다.

스승들은 종교를 만들어 깨달음 대행업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진실로 깨달음을 구하는 삶을 살면 의식주와 상식적인 소망 정도는 덤으로 다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건성 듣거나 종교를 포함한 자영업자들에 속아서 또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그래도 제 경우는 5년 전 겪은 좌절과 극심한 불안이, 완전히 회두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그때 일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편 돈과 권력이 있어 닥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회두할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이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쓰기는 꿀벌이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꽃에게 도움이 되듯이 외부 경제가 되었으면 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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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인간 체험에는 '신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쁨에 비교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현존을 깨닫는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나의 눈, 375쪽)

-- 그야말로 혼돈과 연막이 가득한 우리 현실에서 위와 같은 주제의 책을 한 권 소개하는 게 아웃사이더 짓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내면에 '더 크고 더 강한 무엇'에 대한 열망이 있기에 댓글 달아주시거나 책을 구매하신 분도 계시네요.

과거에는 신 체험이 불가능한 것으로 치고 지상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체험을 사후의 일로 미루거나 포기하고 그저 제도 종교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퉁쳐온 것이 보통입니다. 실상 백 명 정도의 사람이 매일 저와 함께 읽고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에는 모세 말고는 신을 직접 체험한 이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양에서 마하리쉬를 위시한 힌두교 계통의 비이원성 체험이라든지 황벽선사가 말하는 언어도단의 돈오 체험 등이 신체험과 같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가 파악한 동양 영성의 가장 큰 장점은 분노하고 심판하는 신 개념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동서 영성과 잘 융합한 현대 영성인 '그리스도의 편지', '신과 나눈 이야기', 호킨스 박사의 '레팅고', 기적수업 등이 신의 현존 체험으로 잘 안내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존재 상태며 높은 의식의 장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의식이 높아져야 바이블이 말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자기연민의 투사이거나 잇속을 위한 인내 아니면 주고받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두 낮은 차원의 감정이거나 자기만족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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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길

2018.09.12 05:10 | Posted by 목운

깨달음 상태는 이미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상태가 온전히 드러나도록 허용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은 미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 376쪽)

-- 가장 비근한 비유로는 구름이 걷히기만 하면 태양 빛을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의 진화와 사회적 적응을 위한 학습 과정에서 빛을 가리는 구름이 덕지덕지 덮여서 도저히 걷혀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깨달음이 어렵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편 수많은 고정관념과 몸이 나라는 세뇌가 (이 두 가지가 바로 아집과 법집임) 구름 걷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는 물론 노자와 공자께서 모두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 판단도 차별도 없이 그저 기쁨의 상태가 되는 데 깨달음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끄는 힘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매일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 것은, 깨달음 상태에 대한 다른 표현인 열반이나 천국을 바란다면, 만용이자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검증된 올바른 텍스트의 선택과 세속적이고 사기성 있는 스승을 피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가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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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두려움은 자아 정체성(identity)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곧 존재와 생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이 두려움은 생존의 근원 또는 자아를, 형상(생각, 느낌, 몸)과 동일시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나의 눈, 369쪽)

-- 모두 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이 진여문을 말하는 것도 마하리쉬 님이 '나는 누구인가'를 끝없이 물어보라는 것도, 금강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공과 법공을 설하고 있는 것도 모두 같은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두려움과 고통의 근원은 같습니다. 몸을 나라고 여기는 한 고통은 멈추지 않습니다. 몸에서 나오는 생각이란 것을 끊기 위한 모든 수행법이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간단히 우리가 의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뼈에 사무치게 체험할 때까지 세뇌된 것을 씻어내는 노력이 진정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미리 죽어내면 전혀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진정한 자아정체성, 즉 참나는 영원하며 계속 향상함으로써 가시 세계 모든 기쁨을 합친 것보다 월등한 기쁨을 준다는 것이 스승들의 체험이자 보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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