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13장 - 회의주의자

목운 2017. 3. 26. 10:57

회의주의자

널리 퍼진 태도인 회의주의는 정서적이거나 인격적 장애의 결과일지 모르는 반면(예, 프로이드의 '항문기 반항' 또는 부모 권위에 대한 '저항적' 인격) 그것은 오늘날 과학에서 주관적 체험과 '일인칭' 증언의 진실성에 관해 취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토론과 오랜 대화로 진화하는 지적 태도에 반한 것이기도 한다(Bauer, 2006). 이러한 갈등은 그저 패러다임 한계의 결과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펜실바니아 주립대의 찰스 아이젠슈타인 교수는 회의주의에 대한 한가지 조사를 했는데("신념의 상태는 존재 상태다.") '실험자 효과'가 주류 과학에서 신뢰의 문제를 낳는다고 한다(그에 대해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이미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지적으로 이성적인 회의주의로 생각되는 수준에 미달하는 경우에는 숨겨지고 악의적이며 '비열한 정신적' 태도와 세계관(이것들은 흔히 전문적 "'폭로자'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주 냉소적이고 분노에 차며 독단적이고 잘난체하며 감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을 가진 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들은 강의와 책(그 모두가 아인슈타인이 "가짜"이며 "사기꾼"이며 "벌거벗은 황제"로 묘사하는 것들임)을 통해서 아인슈타인을 반박하느라 수년간을 보낸 전문적인 회의주의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부정적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들은 굽히지 않고 심한 비난을 지속하는데(지수 190) 원자력 개발로 아인슈타인이 맞다는 게 확인된 사실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게 분명하다.


정신치료에서 이러한 것은 "논리가 통하지 않는 환각 증세" (Muller, 2006)라고 하는데 "유태인 학살은 없었다."든지 "미국 정부가 9/11을 일으켰다."든지 하는 믿음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 장애자는 자신의 세계관은 진짜고 세상이 속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이러한 증세는 착오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은 뇌 기능 장애와 유아기 자기애적 전능감이 줄어들지 않은 것과 시샘 받는 권위 있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함께 작용한 데 기인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회의주의(skeptikos)란 말은 (피로의 제자들이 말한 대로) 진실은 알 수 없고 지식에 대한 확신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을 가리킨다. 데카르트가 지적한 대로 인간 마음은 외부 도움이 없으면 레스 코기탄스 인테르나(지각이나 의견처럼 사물이 인간 마음에 어떻게 드러나는가)와 레스 엑스테르나(본질, 근원적 실체)를 구분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선(善)만을 구하지만 가공의 선(외양)과 본질('진짜' 선)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여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천적으로 볼 때 합리적 회의주의가 거짓 주장과 어리석음을 밝힌 공이 있지만 회의주의 자체는 종종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키티호크에서 있었던 라이트 형제의 비행에서부터 라디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 양자이론을 포함한 의학과 물리학 같은 과학에서 역사적으로 중대한 발견이 있을 때마다 있었던 공공연한 비난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회의주의자가 신성 자체뿐 아니라 맥락이라는 전체적인 비선형 영적 패러다임을 부인하는 것은 (통과의례와 같은) 전통적인 일이다.


만일 회의주의가 믿는 것처럼 참으로 진리를 알 수 없다면 그들의 전제와 주장도 오류라는 게 자명하다. 그러니 회의주의는 자승자박의 논리라 할 수 있다.


회의주의의 진실성 수준이 왜 그렇게 낮게(지수 160) 나오는지 하는 것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허무주의(지수 120)의 변종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는 근본적으로 맥락의 실체, 특히 500대, 600대 및 그 이상을 논하거나 조사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이 공언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또 회의주의는 내용만을 다루며 의미 자체의 중요성이 완전히 맥락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음에 맥락은 하이젠베르크가 보여준 지향의 표현을 반영하기 때문에 관찰자의 의식 수준에서 나오는 힘과 일치한다.


순진성이나 회의심과 대조적으로 의식 조사법은 무언가를 입증하거나 반증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감을 우회하기 때문에 과거에 진술이나 논증이나 추론으로 알 수 없었던 의식 수준을 분별하거나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회의주의는 선형적 정신 영역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즉 회의주의는 정신적인 것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본다. 비선형 기법에 의해서 맥락의 깊은 영향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비선형 기법을 이용하면 회의주의자의 목적은 분명히 더 잘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뉴턴 물리학이나 미분을 써서 양자역학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실체에 관한 보다 넓은 패러다임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의 증가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훨씬 더 고차원 지식에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회의주의에서 또 하나 이상한 점은 부정의 부정이 곧 긍정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는 유명한 고전인 모순 상자 얘기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즉 상자를 하나 만들어 그 안에 "이 상자 안의 모든 진술은 거짓이다."라는 말을 넣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