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12장 - 패러다임 차이

목운 2017. 3. 24. 20:16

패러다임 차이

실체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의식 수준의 지배적 상태와 일치한다. 어려운 비유를 쓰자면 서양 세계와 유대-그리스도교 문화는 가슴 차크라(사랑, 용서, 관용, 친절 및 약자와 무고한자 및 힘없는 자의 보호)에 일치한다.


대조적으로 샤리아 법은 태양신경총(공격적), 비장(폭력, 증오, 살인) 및 회음 차크라(천상의 성[性])에 모여 있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있는 세계관들이 아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은 산상수훈과 바로 반대편에 위치한다(린드버그의 예수의 정치적 가르침 참조). 신(알라)이 오직 아랍 세계의 기도만 듣는다는 이슬람 가르침도 주목할 만하다.


코란이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 인정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그 대신 노예적 엄격성, 무고한 자의 살해 및 용서 없는 불관용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일치한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나 실체에 대한 공감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유화적인 것을 천박한 약점으로 여긴다. 즉 그것은 그저 공격만을 부르는 약점이자 경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코란에서 문구를 고르면 모든 형태의 폭력과 극단론을 합리화할 수 있게 된다.


서양 사회의 제약인 이성

행동이란 것이 알아낼 수 있고 그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논리적, 합리적 동기에 기반해야 한다고 서양 세계는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극단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요 요인이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도록 무슨 '목적'이 전제돼야 한다(예 목적론적 추론). 실상은 '선'이나 '목적'이란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증오가 언제나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살인극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 만족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이다. 그저 그 본성 요구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살인자는 그저 죽이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동기'나 합리성이 존재할 리 없다.


이상과 같은 것은 2001년 아프카니스탄에서 거대 불상을 파괴한 이슬람 탈리반에게서 볼 수 있다. 그 불상은 약 450미터, 150년 된 세계적인 보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한 자기애적 파괴에 대한 반대와 유감을 표명한 국제연합 사무총장은 그것이 인류에 대한 손실임을 표했다. 또한 나아가 그러한 파괴는 이슬람에게 수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서양에서 그것을 용호하는 이들은 그토록 폭력적인 문화에서 그것을 덮을만한 무언가를 찾고자 애쓰고 있다. [제12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