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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 이슬람 지상주의(3)

목운 2017. 3. 24. 08:23

이슬람 지상주의(3)

오늘날 이슬람의 문제라는 책의 저자 이르샤드 만지와 PBS 다큐 두려움 없는 신앙 같은 사례와 같은 이슬람 폭력에 대한 반대운동이 존재한다. 그러나 저 책의 저자는 평화를 촉구함으로써 이단자로 여겨졌고 방탄 유리로 된 창을 하고 산다. 예를 들면 이슬람은 "이슬람교가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이는 누구나 위협한다."는 풍자가 있다(Godberg, 2007).

편집증적 투사에 의해서 서양 사회는 그 대표인 미국과 함께 '거대한 사탄'이 된다. 무슬림 어린이들은 코란을 암기하고 시온 원로 지식인들의 준칙(이는  증오를 부추기는 거짓된 책자임)을 읽는 것만을 교육받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서양 기준에서 보면 아랍 사회는 전체적으로 여전히 원시적이고 산업화되지 못했으며 본성적으로 부족 문화 수준이다.


물론 종교를 악용한 전쟁은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정권 간에 벌인 기독교도의 전쟁이 있었고 아주 최근에는 북아일랜드에서 IRA의 무장투쟁과 테러, 중동에서의 수니파와 시아파, 팔레스타인의 PLO 등이 있었다. 테러 조직과 그 작동양식은 학술적 저서 테러리스트처럼 생각하기(German, 2003)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서양 세계가 이슬람 문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큰 이유는 발표문과 선언문의 진실성에 관한 문화적 전제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샤리아 법에서는 거짓말하는 것이 이슬람에 유익하면 그래도 될 뿐 아니라 거짓말하는 것이 실상 의무가 된다. 이것은 소통에서의 진실성이 그 반대로 입증되지 않는 한 하나의 전제여야 하는 서양 문화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와 협상하는 서양인들이 참담하게 실패하는 큰 요인이다.


이슬람이 불신자를 죽이라는 코란의 훈계에 따라 폭력과 살인에 의지하는 반면("이방인이 거룩한 아랍 땅을 모독함", "어디서든 그들을 보면 참수하라.") 서양인은 '공정성'과 생명의 보존을 신뢰한다. 이 원칙은 623년 이래 군사적으로 적용되었고 오토만 제국이 지배한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또한 오늘날 '파트와'와 핵무기로 전멸하겠다는 위협에서도 유효하다.


빈라덴은 2007년 9월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서 미국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초대하는 방송을 했는데 미국인들이 단순해서 그 진짜 의미와 시사점을 파악치 못했다. 이슬람 법에 따르면 그것은 이방인에게 개종하도록 초대를 했는데 따르지 않을 때 그들을 죽이는 게 영광스런 일이 된다는, 매우 중대한 위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초대는 미국에 대하여 큰 공격을 하기 위해 길을 내는 치명적이고도 중대한 공식 조치였다. 어떤 이방인이 개종하기로 동의하면 그 목숨은 살려주지만 현금으로 감사표시를 해야 하는 것이다(빈라덴의 2007년 9월 발언은 35로 측정되며 그때 이란 대통령이 미국 주요 대학에 초빙되어 연설하였다.).


위에서 보면 개념상 실체와 체험성 실체 간에 아주 큰 격차가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서양인은 (마태 복음의) 예수에 의한 산상수훈(지수 955)에 깊이 빠져 그렇게 큰 격차를 실제 파악치 못하며 그 위험한 격차는 상대주의의 미사여구와 철없는 이상주의의 포장 때문에 더욱 모호해진다. 헌신적 신앙과 그 광신적 대체물 간의 아주 큰 격차가 존재한다.


신이 전체 인구 가운데 숫적으로 소수인 이슬람만을 창조한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은 이슬람 사상에 대립적이다. 그래서 이슬람 법에 따라 무슬림 세계는 인류 대다수를 죽여야만 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의식 지수 20(어리석음)으로 측정된다. 그 격차는 무하마드의 간질과 그로 인해 의식이 700에서 130으로 추락한 결과로 설명된다.


이상의 모든 격차를 이해하려면 어둠이 빛의 반대짝이 아니라 빛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인 것처럼 거짓은 진실의 반대짝이 아니라 진실의 부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