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5장 - 도입(3)

목운 2014. 8. 14. 16:51

세계의 종교, 스승, 가르침 등에 대한 도표를 보면 가장 강력한 실체는 객관적이고 증명할 수 있다기보다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패러다임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실체란 400대 의식에 속하는 한계를 특징으로 한다. [도표 발췌 - 역주, 토머스 아퀴나스 570, 스리 오로빈도 605, 달마선사 795, 공자 590, 마이스터 에카르트 705, 간디 760, 십자가의 성요한 605, 마하라지 720, 마하리쉬 720, 파탄잘리 715, 플로티누스 730, 확벽선사 960, 소크라테스 540, 아빌라의 성데레사 715, 장자 595, 노자 610]


재미있는 것은 스콥스 재판 자체는 매우 인위적이지만 주된 토론자들은 각각의 고정 관념을 사실상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설명은 505로 측정되며 클레어런스 대로의 경우는 450으로 측정된다. 각 측이 실체에 관한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대표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풀 수 없는 갈등이 있었다. 게다가 브라이언이 종교적이고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는 반면 대로는 지성을 중시하는 세속인이었다.


과학의 패러다임(400대)을 영적이고 종교적인 실체(500대 이상)와 대조함으로써 각 차원만으로는 풀 수 없고 실체에 관한 다른 패러다임의 관점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풀릴 수 있다는 게 명백하다(Gould, 2002).


선형은 세속적이고 한계 내의 것이며 논리적이고 증명가능하며 객관적이다. 비선형은 실효성이 있고 주관적이며 체험에 관한 것이고 제한이 없으며 증명 가능하다기보다 맥락에 관련된다. 200 미만은 실제 파괴적이지만 400대는 건설적이다. 500대 이상은 고양시키는 힘이 있고 영감에 차 있으며 동기를 부여해준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조합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논리와 이성으로 하여금 신에 대한 사랑과 자리이타(自利利他)에 복무하도록 함과 동시에 자비와 신앙의 길을 가는 데 있는 듯하다. 그 조합의 보증이자 특징은, 인간의 순진함과 한계 그리고 마음 자체에 뿌리박힌 무지라는 아킬레스 건을 배려한 자비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전반적 의식 수준은 1980년대 후반에 200 수준을 겨우 넘었다. 인간 삶의 주된 난제는 기록된 역사의 93%의 기간 동안 공공연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의식 수준을 가진 인구집단들이 한데 어울려져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된 점이다. 나머지 7% 기간에는 아마도 다른 재앙(예, 흑사병, 기근 등) 때문에 전쟁이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상에서 분명해진 것처럼 우주의 근원과 본성에 대한 설명들은 서로 다른 의식 수준에서 나온 개념들을 보여주며 또한 말 그대로 시중의 의견에서부터 깨달음이라는 고차원의 의식 수준 및 역사상 위대한 영적 스승이 가르친 계시에 이르기까지의 점진적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생명이 유기체의 모습을 띤 것에서 보듯이 창조의 근본 특성은 진화적이다. 생명의 근원이 우연한 화학적 사건(상향 이론)이라고 보든 신성이라고 보든 그것이 진화적이라는 것은 확실히 서술될 수 있으며 놀랄 정도로 자명하다.


'창조'라는 말은 발생, 출현에 이어 복잡성과 효율성 증가라는 점진적 존재를 가리키는 추상적 말이다. 인간이 의문을 가지는 모든 분야가 점진적이다. 동시에 우주는 빛의 속도로 무한대의 방향으로 확장하고 있다. 조금만 돌아보면 진화와 창조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과정(예 창조는 점진적이고 진행중이며 계속되는 펼쳐짐이며 진화 과정을 띤다)이므로 이들 간에 갈등이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로의 주장은 비유적이어서 증명가능한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해당 문화의 도덕적 가치에서 나온 원시 신화와 전설을 포함하는 성서구절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것들이 논리와 이성에는 위배되는 것으로 보임에도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문자대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믿어졌을 것이다. 사실상 창조의 근원이 신성인 줄 아는 것은, 불교의 진리가 실제 붓다께서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는지 여부를 믿는 것에 근거하지 않는 것처럼, 원래 비유적인 관련 민담을 글자 그대로의 믿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다.


과학적 타당성은 고전이 모아질 당시에는 없던 개념이다. 세련된 사람들에게는 홍해가 진짜 갈라졌는지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3일을 살았는지 하는 것은 주어진 기초적 진리와 상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전해지는 고대 사건들의 기적적 성질에 대해 마음이 끌렸을 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순진한 마음은 본질을 판별하지 못하므로 기적적인 사건의 신비화와 마술처럼 보이는 것과 선정성에 끌린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그것을 눈으로 보게 된 중대한 사건이고 권능을 확인해주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신성이 드러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기적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에 강한 인상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