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5장 - 도입(2)

목운 2014. 8. 14. 09:16

논증에 의한 진리의 한계는 감성주의로 설득하려는 데서 드러난다 (예, 과학자들은 종교와 신앙에 대한 신조에는 '격노'한다. [Van Biema, 2006]). 참으로 진리를 성실하게 추구하는 것을 논증이나 감정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반종교주의는 180으로 측정됨). 진리는 강제나 부흥회식 전도로 밝혀지는 게 아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지향의 순수성과 질문자의 의식 수준에서 나오는 결과다. 마르코 폴로의 극동 발견에 대해 회의주의자들은 비웃었지만 반대하는 탐험가들은 잠정적이고 조사해볼 만한 것으로 여겼다. 


전교는 동의나 지배를 통해 입지를 구하는 에고의 허영이 드러난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 온전하여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E=mc²은 개인의 의견이나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적대적 인신공격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그저 사실일 뿐이다. 회의적 공격은 종종 시기심에서 나온 악의의 표현이며 부러움은 인색한 정신의 증거여서 그런 사람은 위대함 앞에서 초라함을 느낀다. 그래서 흥을 깨기 좋아하는 사람이 크리스마스를 싫어하고 무신론자의 에고는 신의 무한한 영광을 은근히 미워한다. 신성의 잠재성에서 나오는 모든 창조의 에너지가 절대자에 의해서 발생해서 끊임없는 창조로 드러나는 것임에도 에고는 인색하게도 절대자를 불신하려 한다. 


진화 심리학(지수 210)은 250으로 측정되는 다니엘 데네트의 작업에서 드러난 바의 인지 메커니즘을 통해 다윈 이론을 지원한다. 이 주장은 훨씬 상위 차원에 있는 실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인지적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은 의식의 선형적 내용물을 의식 자체의 비선형적 장과 헷갈리는데 그것은 행성을 우주와, 또는 하늘을 구름과 헷갈리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은 중요하다.


무신론(지수 165)은 현재 학계에서 인기가 있고 '잘 알려져 있고' '화려하고' 현대적이며 맵시있고 진보적이고 멋져보이고 명민하며 '최신의' 것이다. 엘리트 사이에 신은 시대에 뒤지고 진부하고 고루한 것이다. 절대주의와 궁극의 실체는 모든 관점이 똑같이 타당하다고 보는 상대주의의 자기애적 고정관념에 의해 조롱받는다. 상대주의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는 것처럼) 실상 아이들의 안달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부질없는 소망이 담긴 사고방식과 환상(예, "사물이란 단지 내가 그렇다고 말하는 대로다.")을 가리킨다.


우연한 화학적 현상에서 생명이 기원했다(한 마디로 '상향'[bottom-up] 이론이라고 함 - 역주)는 환원주의의 주장은 순진한 사람에게는 학식 있는 듯 보이지만 참된 교양 교육을 거쳐 사상의 추상화와 분류 수준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서양 문화에 있는 위대한 고전의 깊은 지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진부하게 들린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것은 열등한 것으로 반증할 수 없다. 의식 수준으로 바꾸어 말하면 200 미만의 사람은 고차원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슷한 예로서 산술과 기하, 삼각함수가 먼저고 그 다음에 미분 방정식과 양자 역학(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등이 있는 것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 기계적 환원주의('상향' 이론은 185로 측정됨)는 그것이 부정하고 싶은 영역에 접근조차 못하는 것이다. '인과율'조차 400대 중간의 특정 수준에만 관련된다. 창조의 실체, 신성과 영적 실상은 600 이상이며 190~250 수준의 능력으로는 논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창조주의에 대해 '분노하고' '기분 나빠하고' '격분을 표하는' 등 오늘날 반종교주의자의 표현에서 불성실한 편견이 보인다. 대조적으로 진실한 구도자는 객관적이고 편협하지 않으며 확실한(즉 감정이 아니라 체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에고의 허영(지수 190)은 끝이 없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는 대담한 환상으로 부풀어 있다. 인지란 선형적 상징, 즉 제한된 진술 내용에 국한된 언어적 추측일 뿐이다. 거기에 실제 객관적 실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해봐야 순전히 주관적 추정일 뿐이다.


말이란 기껏해야 외양에 대한 설명일 뿐이며 본질과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체험은 상징과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래서 오페라나 교향곡의 악보가 미학적 기쁨을 낳는 게 아니라 음악 자체가 기쁨을 가져오는 것은, 음악이 음악적 기호로 된 악보와 다른 높은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신을 대체하기 위해 왜 그토록 단호하게 투쟁까지 할까? 답은 그것이 실로 자신 외에는 그 어떤 주권이든 논박하고 은밀히 증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애를 스스로 영속화하려는 중핵이다. 마음은 우주에 대한 의견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우주나 생명을 창조할 수 없으며 더더구나 의식을 창조할 수 없다. 의식이란 그 자체 창세기가 말하는 창조의 '빛'이다(이 진술은 무한으로 측정됨). 신을 비판하는 자는 그 빛(신성) 자체를 말하지 않지만 그 빛은 단순한 진술이라는 한정된 영역과는 아주 먼 것이다. 


400대 수준에서 드러나는 실체에 관한 말로 된 객관적 선형 패러다임과 대조적으로 비선형적 영적 실체는 400대 상위에서 시작되어 500대(사랑)에서 지배적이며 1,000에까지 이른다. 이 수준이 인간 영역에서 도달할 수 있는 에너지의 최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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