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되기

12장 2

목운 2014. 12. 3. 07:47

'인간 게임'의 전반부가 '무한한 나'의 본래 상태의 반대가 되도록 짜여졌기 때문에 놀이 동산의 롤러코스터처럼 그 현실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힘이 들어갑니다.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 가장 먼저 겪는 일은 고바위를 올라가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높이 올라갈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바위를 올라가는 데는 중력의 법칙과 같은 모든 자연법칙에 도전하는 게 필요합니다. 정상으로 가는 일은 엄청난 힘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내면 체험"을 합니다. 많은 경우 공포가 될 것이고 사람마다 광범한 반응을 보입니다. 흥분이나 당황, 심지어 구토를 느끼죠.

 내 경우 내가 경험한 모든 것에 저항했습니다. 좋아하지도 않았고 느낌도 나빴으며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거기서 빠져나오길 바랬죠. 그러나 다음번에 무엇이 오고 봉우리 바로 뒤에 올 환희에 대해서도 알았죠.

 마찬가지로 제약과 한계 속으로 가능한 한 깊이 들어가는 일도 롤러코스터처럼 저항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싫어하고 기분 나빠하고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빠져나오고 싶어하죠. 그래서 우리는 전반부에 대해 저항하고 왜 그런 체험을 해야 하는가 하고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계된 '게임'이기 때문에 그렇죠.

 내가 롤러코스터 비유를 좋아하는 다른 이유는 상승 체험이 없이는 그 다음에 올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게임'처럼 롤러코스터에도 "전후반"이 있습니다. 전반엔 올라가고 후반엔 내려가죠. 객관적으로 보면 전반이 후반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지" 않습니다. 실상 후반은 전반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쪽이 다른쪽보다 좋다는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롤러코스터의 후반에 있는 사람이 전반에 있는 사람보다 더 "깨달았거나" "더 낫거나" "더 진보했거나" "더 올라갔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다른 지점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나와 같은 누군가가 고치 삶의 막바지에 있다고 해서 영화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깨달았거나" "더 낫거나" "더 진보했거나" "더 올라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탈바꿈의 다른 지점에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이고 롤러코스터의 정상을 지나 많은 체험을 했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이 비유를 좋아하는 마지막 이유는 우리가 통상 한계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뒤집어준다는 것입니다. 한계 속으로 "내려" 간다거나 깊이 "내려" 간다기보다 롤러코스터의 전반부는 "올라" 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생의 "바닥"을 친다고 말하는 대신 정상에 도달했다라든지 한계의 극점에 이르렀다든지 하는 말을 쓰는 것이 낫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게임'의 후반을 시작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판단을 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내가 아파트에서 직업도 돈도 이런저런 것도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한 날이 나에게는 롤러코스터의 꼭대기에 해당합니다. 그 순간은 마치 무중력 상태 같아서 하강을 시작하기 직전에 모든 저항을 내려놓은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그 순간은 모든 판단이 사라진 순간이고, 명료하고도 완전히 객관적인 순간입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정상에 온 것에 대해, 심지어는 그동안의 등정에 대해 감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다음 코스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그저 매어달려 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극장 뒷문을 걸어나가 '인간 게임'의 후반을 시작하는 겁니다.   


'나비되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장 4  (0) 2014.12.03
12장 3  (0) 2014.12.03
12장 1 ; 전후반 모델  (0) 2014.12.01
11장 6  (0) 2014.12.01
11장 5  (0) 2014.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