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되기

10장 4

목운 2014. 11. 18. 18:11

  또 다른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당신은 조그만 배에 앉아 수많은 경치를 체험합니다. 그 모든 체험이 당신의 내적 체험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기쁨과 가슴뜀에서부터 두려움과 긴장에 걸쳐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여행길과 경치를 기획한 사람이 있어서 당신은 어디로 갈지 어떤 일을 만날지 택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는 유일한 일은 배에 앉아서 여행을 즐기며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반응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물론 어떤 대응이나 반응도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기획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과 바라는 모든 것은 그가 마련한 체험에 대한 당신의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누구도 카리비안의 해적을 만든 사람의 꼭두각시나 노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고 '무한한 나'의 연기자라는 생각에 저항하는 것은 당신의 에고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대한 통제를 놓지 않으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까지 별로 잘 해오지 못했음에도 우리 삶을 계속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극장 안에 있는 동안 삶은 꼭 그렇게 되도록 짜여진 것입니다. 모든 종교와 정신 철학이 그렇게 이끌어왔듯이 우리는 우리가 버스 운전자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영화관을 떠났고 나비가 되려고 합니다. 그 절차의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부분은 통제하려는 욕구를 버리는 것, 즉 버스 운전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좋소, 좋아. 내가 '무한한 나'의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합시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체험하는 바의 공동창조자는 되고 싶어."라고 내 친구는 주장합니다.

 나는 이점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공동창조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체험에 대한 반응이 다음의 체험에 대해 영향을 줄 수는 있습니다.

 만일 내 '무한한 나'가 버스 운전을 하고 나는 지나가는 경치에 반응만 하고 앉아 있다면 내 '무한한 나'가 특히 재미있고 탐구해보길 원하는 반응을 내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되돌려 그 경치를 다시 지나가며 같은 체험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비슷한 경치를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 첫번째 반응이 다음번 비슷한 체험을 하도록 "공동창조"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홀로그램애서 무언가에 대해 두려움을 보였다면 내 '무한한 나'는 아주 비슷한 홀로그램을 보내 다음번에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자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게 없는데 왜 그렇게 겁먹었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고, 내 스스로 두려워할 게 없음을 깨달았으면 할 수도 있고 혹은 그저 내가 다시 같은 두려움을 느끼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다음 장에서 재론함).

 카리비안의 해적으로 돌아가서 기획자가 성공적인 여행을 만들고자 했다면 그가 만든 환경에 대한 참가자들의 반응에 대해 아주 관심을 가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가자의 피드백은 그가 더 나은 게임을 만드는 데 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모든 종류의 가능성이 있지요. 요점은 어떤 체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미래에 주어질 체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반응으로써 무한한 나와 미래 체험에 대해 "공동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하려고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당신의 '무한한 나'는 당신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미래 체험을 마음껏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그 과정의 일부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친구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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