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삶의 확실성 문제와 신비가

목운 2023. 3. 11. 12:12

이 땅에서 70년 가까이 살면서 체험하거나 관찰한 삶의 모습을 셋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제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제도 교회에 소속된 종교인 내지 신앙인의 삶이 그 하나요 제도 종교와 결별하되 신을 부인하지 않는 신비가의 삶이 있는 반면 관찰컨대 통속적으로 살면서 점을 치거나 복을 빌러 다니는 무속인의 삶이 있습니다. 마지막의 경우 생업으로 무속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실제로는 종교인 가운데 무속인의 삶을 병행하는 사람이 있고 종교인이지만 신비가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경우 우리는 불확실하고 고통을 피할 길 없는 현실에서 확실성을 구한다는 점입니다. 확실성이라 하면 승진, 건강 등 행복과 관련하여 미래의 확실성을 구하는 것으로 제 경우 무죄함 또는 구원의 확실성을 목말라 했습니다. 제가 종교인으로 살 때는 교회를 이용하거나 또는 거기에 의존해서 확실성을 구했습니다.

중년을 지날 무렵 교회가 여기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느껴 책을 비롯해서 다른 가르침을 찾아나섰고 결국 종교를 버리고 신비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길에 확실성이 있을 뿐 아니라 밖에 있는 무엇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신앙인이었을 때 가졌던 스승 예수와 성부에 대한 믿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다만 삼위일체 교리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비가의 길은 과학과 철학에 의존하지만 그 모든 것을 수단으로 여기며 스스로 확실성을 습득하면 스승을 비롯한 기타 수단을 모두 버릴 수 있습니다.

돌아볼 때 여기서 논하는 확실성은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몸을 벗어버린 후에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제도 종교가 실패하는 지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면죄부 판매입니다. 아무리 번역의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면죄부라는 말이 돈으로 사후 구원을 얻으려 했다는 본질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무속을 소비하는 거의 모든 사례 또한 현세 복락만을 구한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현세 복락만으로 충분하다거나 돈으로 사후 구원이 확실해진다면 신앙인이나 무속인의 길이 정답이고 신비가의 길은 오답이거나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임종을 해야 합니다. 곁에 누가 있더라도 미지의 세계를 앞두고 스스로 얻어 아는 확실성이 아니면 불안합니다. 현세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얻기 전에 사후 확실성을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과의 직접 대화 또는 체험을 함으로써 몸을 벗은 후의 존재상태를 이해하는 경지를 공자님은 종심소욕불유구로, 불가에서는 출세자유인으로 말했는데 그 길이 바로 신비가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설파하신 지금 이곳에서부터의 천국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원학적으로도 신을 안다는 것은 신과 하나라는 뜻입니다. 신을 아는 자는 생명의 유지와 존속을 우려하거나 그밖의 어떤 두려움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스스로 확실성을 체득해서 자신 있게 그리고 후회 없이, 심지어 승자처럼 기쁘게 임종할 수 있는 길은 종교인이나 무속인의 삶이 아니라 신비가의 삶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을 위한 실용 지침  (0) 2023.04.02
제일 계명과 멸정복성  (2) 2023.03.26
종교의 종언과 영성의 진화  (0) 2023.02.23
죽음에 대한 승리  (2) 2023.02.06
근원과의 합일, 그리고 노후 대책  (0) 202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