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 1

목운 2019. 12. 3. 08:18

  일자성

 

대사상가의 작업을 한 가지 아이디어로 줄인다는 것은 언제나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에크하르트의 경우 하나의 주된 관점이 다른 모든 것이 어느 정도 그 하위 개념이 되도록 지배적 원칙으로 작용한다고 보아도 어느 정도 정당한데 그것은 바로 일자성이다.

 

일자의 신학 또는 철학은, 우주의 궁극 원칙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이며 나눌 수 없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다른 모든 것과 구분된다고 하는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일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수이며 부분이며 나눠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자는 우주의 나머지와 동적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도 알려진다. 여타 우주는 일자에 기인하며 그래서 또한 그 근원을 '돌아본다'. 일자는 따라서 모든 것이 일자에 비추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체험의 대상이 다수이기 때문에 일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일자는 홀로 (만일 참으로 '존재'라는 말을 거기에 돌릴 수 있다면) 근원적이며 영원한 존재인 반면 다수에 속하는 모든 존재는 불가피하게 덧없다. 프로클루스나 플로티누스 같은 신플라톤주의자에게 구원이란 다수와 부분의 영역에서 마음의 지복을 통해 잡을 수 있는 근원인 일자에로 인간 마음이 상승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도미니코 회원인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도전과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계시의 맥락 안에 탄탄한 형이상학을 수립하는 것인데 그 일은 삼위일체와 육화의 교리 안에 신성(Godhead) 차원에서 다수성을 정확히 진술하는 것이다.

 

첫째로 에크하르트는 일자의 개념이 신을 말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본다. ('선'이신 하느님, '전능자' 등) 다른 모든 것은 거기에 무언가를 '보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을 가리는 것 같다. 일자성만이 신의 본성보다 인간 본성에 가까운 무엇을 돌리는 것 같은 개념으로 신을 감싸지 않으면서 말로 신의 본질을 근사하게 파악하게 한다. 그러나 물론 삼위일체 교리는 신 안의 다수성을 필요로 하며 에크하르트가 신의 일자성을 다자성 위에 두거나 적어도 신의 '일자성'을 '삼자성' 앞에 두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문구들이 있다. 그러한 문구들의 바탕에는 이름과 개념이 근본적으로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에크하르트의 믿음이 깔려 있다. 즉 그런 것들은 특정하고 국부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에크하르트는 '일자성'이 아니라 '삼자성'을 그러한 개념 속에 포함시킨다(강론 30). 그러나 셋인 신을 버리고 하나인 신을 앞세우는 이런한 경향은 다른 것에 대항해서 놓여져야 하는데 다른 것이라 함은 에크하르트 사상에서 또한 강력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신은 물질적으로 '다산적(fertile)'이라는 믿음이다. '아버지 신'은 계속해서 '아들 신'을 낳는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은 언제나 동적이며 삼위와 인간 개개인 안에서 자신을 재생산한다. 에크하르트는 신의 이러한 산출 기능이 그 본성에 부차적인 게 아니라 본질적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을 취하고 그리스도교 교리를 거부했다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그의 사상은 토머스 아퀴나스 신학에서 발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에 필적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신플라톤주의 유산을 그리스도교 정통입장과 화합시키려는 대담한 시도로 보인다. 그 과업을 어떻게든 감행했었다는 것은 신플라톤 철학의 시간을 넘는 진정성에 대한 깊은 믿음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강한 신념의 결과다. 언젠가 그는 이교 철학자와 모세 및 그리스도가 다르게 설파했고 진리의 구현 정도가 다를지라도 (신플라톤주의자 같은 이교 철학자는 그리스도가 진리인 반면 진리를 가르치는 데 그쳤지만) 똑같이 진리를 가르쳤다고 썼다. 어쨌든 그 융합이 성공적이라고 판단하든 아니면 삼위일체와 육화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해설에 미진한 긴장이 있다고 느끼든 그의 작업은 중세에 있었던 철학과 신학의 위대한 종합 노력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