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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르와 보살 사상

유태인 전승으로서 비전적 교훈, 명상법 등 신비적 가르침의 총체를 카발라라고 하며 그 주요 텍스트가 조하르입니다. 조하르는 모세 오경의 주석 형태를 취하는데 성서 짜깁기, 미드라쉬(유태의 훈고학이라 할 수 있음), 중세 설교와 기타 픽션 및 판타지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핵심 주제는 인간과 신적 실체의 상호작용입니다. 조하르에 입문하면서 인상 깊은 두어 가지 적어보려 합니다. 첫째는 조하르 중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열 가지 세피롯이란 무한자의 속성 내지 발현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삼위일체는 신의 세 위(位, persona)가 하나라고 하는 반면 조하르는 십위(十位)가 하나라고 봅니다. 조하르는 이러한 십위가 결국 의식 지도이며 존재의 차원으로 보고 ..

단상 2018.09.16

명상, 침묵

지관문(또는 명상)을 통해 신인합일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입니다. 지루하고 답은 없이 사막을 가는 심정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이블은 그 길이 '곧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승들 말씀을 읽고 그냥 홀로 있는 시간을 자주 내면서 보시-지계-인욕 등 오행에 몰입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쉬지 않고 자신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예, 미륵존여래불, 아미타불, 그리스도 예수 등)을 계속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당신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아지경과 같은 것을 바랍니다. 무아지경은 필연적으로 오고 갑니다. 인간 뇌가 그런 압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순수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고 길게 늘인 무아지경이라면 우리 뇌는 타버..

제가 글쓰는 이유

결국 삶의 선택은 둘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젊었을 때보다 확연해집니다. 하나는 세상을 원만히 살면서 '잘 나가는' 삶이고 또 하나는 세상과 삶을 완전히 이해하고 '세상에 있지만 그저 세상을 가운처럼 걸친 듯' 사는 삶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한 삶과 깨달은 삶입니다. 제가 스승으로 보는 이들은 후자의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일찍부터 그런 삶을 선택하는 상근기 사람이 희귀한 것도 사실입니다. 보통은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다가 아예 후자에 관심 없이 세상에 몰입하거나 좌절과 고통을 만나 회두하여 깨달음에 관심을 가진다고 봅니다. 스승들은 종교를 만들어 깨달음 대행업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진실로 깨달음을 구하는 삶을 살면 의식주와 상식적인 소망 정도는 덤으로 다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

단상 2018.09.14

신의 사랑 체험과 애덕 실천

보통의 인간 체험에는 '신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쁨에 비교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현존을 깨닫는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나의 눈, 375쪽) -- 그야말로 혼돈과 연막이 가득한 우리 현실에서 위와 같은 주제의 책을 한 권 소개하는 게 아웃사이더 짓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내면에 '더 크고 더 강한 무엇'에 대한 열망이 있기에 댓글 달아주시거나 책을 구매하신 분도 계시네요. 과거에는 신 체험이 불가능한 것으로 치고 지상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체험을 사후의 일로 미루거나 포기하고 그저 제도 종교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퉁쳐온 것이 보통입니다. 실상 백 명 정도의 사람이 매일 저와 함께 읽고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에는 모세 말고는 신을..

깨달음의 길

깨달음 상태는 이미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상태가 온전히 드러나도록 허용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은 미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 376쪽) -- 가장 비근한 비유로는 구름이 걷히기만 하면 태양 빛을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의 진화와 사회적 적응을 위한 학습 과정에서 빛을 가리는 구름이 덕지덕지 덮여서 도저히 걷혀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깨달음이 어렵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편 수많은 고정관념과 몸이 나라는 세뇌가 (이 두 가지가 바로 아집과 법집임) 구름 걷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는 물론 노자와 공자께서 모두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 판단도 차별도 없이 그저 기쁨의 상태가 되는 데 깨달음의 비..

참된 정체성으로서의 의식

모든 두려움은 자아 정체성(identity)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곧 존재와 생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이 두려움은 생존의 근원 또는 자아를, 형상(생각, 느낌, 몸)과 동일시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나의 눈, 369쪽) -- 모두 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이 진여문을 말하는 것도 마하리쉬 님이 '나는 누구인가'를 끝없이 물어보라는 것도, 금강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공과 법공을 설하고 있는 것도 모두 같은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두려움과 고통의 근원은 같습니다. 몸을 나라고 여기는 한 고통은 멈추지 않습니다. 몸에서 나오는 생각이란 것을 끊기 위한 모든 수행법이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간단히 우리가 의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뼈에 사무..

의식 공부가 긴요함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저절로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에 이를 가능성은 의식의 본성에 대한 높은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나의 눈, 354쪽)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면 반드시 이원성과 비이원성의 차이를 통찰하게 되고 아울러 이원성의 영역을 초월하는 법도 알게 됩니다. (위 책, 357쪽) -- 여기에 무슨 주석을 붙이는 게 주제 넘지만 한 가지만 거론한다면 세상 교육이나 종교는 그저 좋은 사람 또는 착한 사람을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하지만 의식이 바깥 세계만을 맴도는 한 폐쇄 체계를 뱅뱅 도는 모습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철저히 세속적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결국 성공한 이들, 평생 한번도 ..

참된 예배

행동하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관찰하는 자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어봅니다. 지속적인 명상은 모든 행위를 일종의 예배로 바침으로써 그 행위를 모두 성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눈, 321쪽)-- 이 대목에서 마하리쉬의 자아탐구를 만나며 대승기신론의 지관문을 만납니다. 이것들은 실천적으로 하나입니다. 선가귀감은 "예배란 참된 근원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禮拜者 恭敬眞性 屈伏無明)"이라 함으로써 이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그 실천방법으로는 기본적으로 홀로 고요히 있는 것인데 생각마다 끊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 끝없이 무량광 무량수인 아미타불(이것은 아무 이름이어도 상관 없습니다)을 외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비운 자리에 신 의식이 들어와 무한하고 거룩한 뜻을 실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의 정의와 인간의 선택

참나라는 무한한 바다 속에서 자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의해 자신의 운명으로 끌려 갑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인 공정함과 공평함을 보장해주는 의 절대적인 정의입니다. (나의 눈, 307쪽) -- 어제 올린 무한한 바다의 비유가 또 나옵니다. 바다의 비유는 대승기신론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이 무한한 바다에서 몸을 벗은 각 에너지체는 자신의 본질, 즉 의식 수준에 따라 자리를 잡는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모든 사언행위는 궤적을 남기며 하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의 결과이기도 한 우리 의식의 수준에 따라 딱 맞는 자리에, 마치 자기 부력에 따라 물체가 바다에서 자리 잡듯이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시공(時空) 안에 들어와서 인간에게 간섭하고 사후에는 재판관처럼 심판하는 신을 생각하는 것은 가..

의식이 우리 현실임

'나'라는 감각이 있는 자리인 에너지체(또는 영혼)는 몸에서 벗어난 체험을 한 사람들이 기억하듯 몸과는 별개로 존재합니다.. 의식의 장은 측정할 수 있는 다양한 레벨과 에너지 장이 상호 작용하는 무한한 바다입니다. 따라서 한 개별 영혼이기도 한 에너지체의 운명은 바다 속의 코르크와 유사합니다. (나의 눈, 306쪽)-- 불교는 이미 우리 몸이 무정물이라서 체험을 하는 자리는 별개로 존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있습니다. 생각과 오감은 그 스크린 위에 비치는 영상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을 버린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말하는지 압니다.스승들은 몸을 버리는 순간의 의식이 사후에 고정되는 의식 수준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때의 의식 수준이 마치 바다 속 코르크와 같아서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