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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현대 영성 비교

제 글을 자주 접하신 분은 성리학의 핵심을 파악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헌만 제대로 읽으면 링크한 다산의 중용 해석에서처럼 희로애락이 나기 전의 상태, 즉 '중'이 유교 수행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중'에 이르기 위해 '신기독'하는 것이며 그 실천으로 '경'을 가장 강조하신 분은 남명 선생입니다. '경'이란 바로 대승기신론의 '지관문'으로 보면 되고 지관문이란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가리킵니다. 우연히 '중용자잠'을 접하고 현대 영성과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제 경우 현대 영성이란 '그리스도의 편지'와 '신과 나눈 이야기'를 말합니다. 요컨대 다산을 비롯한 (과거의 저도) 대부분이 '상제' 또는 하느님을 심판하고 벌주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을 악한 것..

단상 2018.09.06

진화와 창조

진화와 창조는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다. 창조는 진화의 근원이자 본질이며 진화는 창조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물리적인 세계는 결과들의 세계요 그 안에 원인이 되어줄 만한 힘이 없는 세계다. (나의 눈, 162쪽)-- 다시 말하면 신의 창조는 신 의식이 행하는 것이며 의식의 특징은 지성과 의도, 심미적 앎이라고 합니다. 신 의식을 나누어 받은 인간 의식을 포함한 모든 의식체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는 것이 진화라고 합니다. (같은 쪽)이것은 매우 중요한 깨달음인데 관찰되는 환경을 바꾸려면 내 의식을 바꾸고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 의식을 바꾸는 것이 현명한 노선임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내 운명을 바꾸는 것, 세상의 모습을 바꾸는 것, 모두가 의식 변화에 달려 있습니다.그러므로 결과를 ..

바라봄(觀照)이란!

관조란 어떤 관념이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휘말려들지 않은 채 저절로 흘러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의 이미지가 저절로 일어나고 그 생각은 우리의 독자적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선택이 아니며 생각의 흐름이란 독자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눈, 138쪽)-- 흔히 우리가 생각을 하는 주체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실은 우리 의식이 어떤 장(場)에 올라타 있는가가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무한히 존재하는 의식의 장이 얽혀져 있는데 각각의 장에서 생각들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기쁨과 평화가 주조를 이루며 존귀하고 우아하며 권능이 있는 생각이 저절로 흘러나온다면 우리는 높은 의식의 장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의식의 장은 끌개장의 성격을 가지..

영적인 길은 선택임

우리는 그저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요소를 넘어선다. 영적인 삶을 열심히 좇는 내적인 수행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부정적인 선택지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의 눈, 98쪽)-- 이 구절은 '죄와 싸우고' '의지의 힘'으로 결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효과가 없음을 말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심판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자세로 오직 치료와 해답을 구하는 결단이 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명상이 필수적인데 명상의 핵심 요소는 '생각 끊기'이기 때문입니다. 대승기신론을 인용합니다."일체의 모든 상념을 생각생각마다 다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도 없애야 한다... 마음이 만약 흩어져 나간다면 곧 거두어 와서 정념(正念)에 머물게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선택이다!

"마음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을 가진 텔레비전과 같아서 한 생각이 유혹한다고 해서 그것을 좇아갈 필요가 없다... 자기연민, 분노, 근심 등 모든 선택이 마음을 은근히 잡아끄는 것은 거기에서 내적 보상이나 은밀한 만족감을 얻기 때문이다.이런 보상을 거부할 때 생각의 스크린 뒤에 보이지 않는, 생각과 무관한 고요한 기쁨의 공간이 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공간은 늘 접할 수 있지만 그것을 체험하려면 마음을 유혹하는 모든 선택을 넘어서서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나의 눈, 74쪽)-- 복성서의 실천 요점은 근심도 생각도 하지 말라(弗慮弗思)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을 달고 다니는 것도 선택입니다. 고요히 홀로 있을 때 바로 신을 만난다는 것은 이미 기독교 시편에 써 있습니다(46:10). '..

우리가 기적의 창조자임

더 높은 의식 수준에 이른 사람에게 기적적인 현상은 평범한 일일 뿐 아니라 자연스런 사건들의 흐름이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기적은 인과관계에서가 아니라 창조에서 나온다. (나의 눈, 186쪽)-- 제 글을 꾸준히 읽는 분께서 호킨스 박사의 '의식혁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으신 것 같은 포스팅을 하셨습니다. 박사의 책에서 발견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살면서 겪은 일을 영적 수행이란 차원에 맞추어 세세히 기록한 것, 즉 자전적 체험을 꼭 책 뒤에 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그 가운데 인상 깊은 것은 고질병이 저절로 낫는 체험입니다. 보통 기복적 신앙에서는 부와 건강 등을 직접 구하지만 신 의식의 의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먼저 신 의식에 맞추어 사는 것에 집중하며, 그 요령은 에고를 벗어나서 고요히 ..

학이시습과 향원

"에고란 인간 의식이 그것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에 의해 실려가는 것에서 비롯된 철벽 같이 굳은 생각의 습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생각의 습성들은 반복과 사회적 의견 일치를 통해 강화된다. (나의 눈, 184쪽)" -- 에고를 이해하는 것이 멸정복성과 극기복례의 입구입니다. 그래서인지 어제 인용한 금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는 생각을 버릴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합니다. 에고는 또한 의식 세계에서 특정한 자리 또는 입장(position)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킨스 박사는 에고를 설명할 때 'positionality'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에고는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안정을 희구하는 본성 때문인지 특정한 자리, 즉 의견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중등 교육을 통해 수없이 ..

중력장 벗어나기

"영적인 진화는 지구 중력을 벗어나는 우주선과 아주 비슷하다. 처음에는 중력을 떨쳐버리기 어렵지만 결국에는 중력장을 벗어난다. (나의 눈, 172쪽)"-- 영적 진화는 의식의 진화로 바꿀 수 있겠습니다. 중력을 벗어나려는 욕구가 우리에게 있을까요? 가시 세계 모든 것을 충족해도 '더 많은 무엇', '더 큰 무엇'을 열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중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차원이 다른 욕망임을 깨닫지 못하면 불노장생을 간구하며 세상에 잘 통하는 삶, 달리 말해서 통속적인, 또는 세속적인 삶으로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이 욕망에 가장 부합하는 삶을 선가귀감은 '세간을 벗어난 자유인(出世自由人)'이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73절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금강경의 요점과 같습니다..

생각의 매력과 복성서

생각의 매력은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여 귀하게 여기고 거기에 찬탄하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특별한 것으로 보는 데서 비롯한 과장된 평가에서 나온다. 그런 마음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히 겸허한 자세와 배후에 숨겨진 동기를 버리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나의 눈, 143쪽)--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우리의 애착과 미련이 있습니다. 복성서가 얘기하는 희로애락애오욕, 즉 정(情)이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통틀어서 현대어로 에고라고 부릅니다. 에고가 참나, 즉 복성서 용어로 성(性)이 발현하는 것을 막기 때문에 불려불사(弗慮弗思)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이 점은 바로 대승기신론의 노선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에고가 실체라고 믿어 그것을 버리기 꺼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체가 아..

복성서 2018.08.30

정허동직(靜虛動直)과 중화(中和)

주돈이의 통서(通書)는 주희와 이고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희는 주돈이에 대해 평하길 "선생(周惇頤)의 학문은 그 오묘함이『태극도설』하나에 구비되어 있으니, 『통서』에서 말한 것도 모두 이 『태극도설』의 내용이다."라 하는 등 주돈이를 극찬하면서 태극도설을 해설 발전시켰습니다. 한편 김용남 님은 주돈이가 이고의 사상을 이어받았으며 통서의 많은 부분이 복성서의 내용과 일치하거나 흡사하다고 합니다(이고, 성리학의 개창자, 159쪽). 이고를 성리학의 개창자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분이 불교와 유교의 핵심을 통합적으로 실천하여 스스로 사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주돈이가 지은 통서의 한 구절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노력해서 상근기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 ..

복성서 2018.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