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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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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2018/04'에 해당되는 글 20

  1. 2018.04.30 편지를 통한 그리스도의 소명
  2. 2018.04.29 평생 실천할 일
  3. 2018.04.28 천국에 이르는 길
  4. 2018.04.26 공부의 요체
  5. 2018.04.25 세상을 건너는 확실한 길
  6. 2018.04.24 상자 밖의 사고
  7. 2018.04.23 회광반조와 명상
  8. 2018.04.21 개혁과 동양 영성
  9. 2018.04.20 깨달은 사람
  10. 2018.04.17 동서의 수양론
2018.04.30 02:22 그리스도의 편지

- 2천년 전 예수는 부족 수준의 신 의식이 완전히 오류라는 것을 가르치다가 반발을 사서 죽었다. 징벌을 얘기하여 두려움을 일으키는 신 개념은 세속적 통치용이다.

- 모든 이의 운명은 천국을 향한 상승 행로를 가는 것이다.

- 편지를 통해 설파하려는 것은 창조원리를 이해시켜 지속되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주려는 것이다. 특히 일체는 진동주파수이며 에너지이고 의식이므로 사물의 진동을 바꾸고 새 의식을 주입하면 사물은 바뀐다. 따라서 필요한 것을 시각화해서 전심전력 믿으면 현실화된다.

- 또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생각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비판과 판단을 하면 그것은 되돌아온다. 타인에 대한 바람이나 통제되지 않은 감정도 조심해야 한다. 파괴적인 생각이 파괴적인 결과를 부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조사해보면 너희 실패의 원인을 알 수 있다. 냉대하는 것, 울화를 가지는 것도 파괴적이다. 날씨에 대한 불평은 더 가혹한 날씨를 부를 수 있다.

- 그러니 너희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을 신 의식에게 가져가서 그것이 너희에게 맞게 해주시도록 청하라. 그러면 너희와 연결된 신 의식이 답하시어 사태를 너희에게 맞도록 해 주실 것이다.


삶이 꼬이거나 실패로 치닫는 것은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생각을 조심하고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좋은 방법으로서도 명상이 필수적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의식을 안으로 돌려 신 의식을 찾으려는 실천이 바로 명상이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의식을 안으로 돌리기 위해서 매일 최소한의 시간을 내면 그것은 일상 생활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알면서 행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편지 읽기는 탁월한 영적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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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29 08:27 공부의 요령과 요점

이제 겨우 초심자로서 깨달음 또는 마음에 관한 학습내용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첫째는 인문적 유희가 제 유일한 취미이고 둘째는 그간 세상에서 통하는 삶이 결코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삶이란 착한 사람이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고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흔히 성공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있는 지점이 이것일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고위 공직을 거치고 유명한 종교단체에 등록된 자들로서 부패인사로 심판받고 감옥에 가는 이들이 여러 두름이 되고 남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은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 보살이 되는 것 또는 지상천국에 들어가는 것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저는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 세 가지는 모두 한 가지입니다. 세상의 도덕은 언제나 피상적입니다. 말로는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의 안빈낙도를 높이 찬양하지만 왜 그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지 알아보고 깊이 실천할 의사가 없습니다.


안회의 실천은 장자에 쓰여 있는바 심재와 좌망입니다. 그 요점은 에고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점은 바로 중용에서 중(中)이 천하지대본이라고 함으로써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중이란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며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말합니다(탄허록, 187쪽). 하지만 세상 사람은 중이란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을 취하는 것이라고 대충 이해해버리고 맙니다. 중을 체득한 자는 높은 의식의 장에 올라타 있기 때문에 언제나 환희에 넘치고 먼저 주며, 용서하고 말고 할 일이 없으니 누구에게나 똑같이 자비롭습니다. 이 길이야말로 평생 가야 하고 간 만큼 이익이니 손을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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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28 06:11 공부의 요령과 요점

앞서 정리한 제 공부의 요점은 평생 배우고 읽은 것의 결론이라고 해도 됩니다. 결국 고금동서에 걸쳐 인간 마음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모든 가르침의 요체는 같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다만 정상에 오르신 분들이 문화와 언어에 따라 표현을 달리 했기에 많은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오늘날 이 길에 들어서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은, 무언가 쟁취하고 성공하여 이러저러한 요건이 성취되어야 행복할 것이라고 세뇌하는 온갖 프로그램과 깨달음처럼 어려운 일이 내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심입니다. 그래서 마하리쉬 님은 '깨달음이란 내게는 먼 얘기다.', '쉬운 일이 아니다.', '참나를 알기 위해 극복할 게 너무 많다'와 같은 생각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7세기에 이 길을 안내한 승찬스님도 '진리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다.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면 된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신화는 이원적 세계로 들어서기 이전의 상태가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바로 내면에 있으며 소아를 잊는 데 있다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고 소아를 잊는 방법은 명상을 통해서 생각과 감정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의 인도대로만 사는 것입니다.


갓난 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신적 환희의 표현'인 우리 존재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진화와 몸의 생존을 위해 장착된 에고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데 통달함으로써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에서나 행복을 누리는 일은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실천해내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하기 시작하면 어제 죽은 것보다 오늘 죽는 것이 다행이고 언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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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26 07:18 공부의 요령과 요점

제가 파악한 공부 목표로서의 깨달음이란 에고가 사라짐으로써 드러나는 비이원성의 상태를 말합니다. 공부의 방향과 지도를 가지고 있어서 평생 이 단순한 과정을 실천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마하리쉬 용어로 하면 바사나(習)를 다 버리면 마치 두레박 끈이 끊어져 물 속으로 들어가버린 상태인 '본연적 무상 삼매'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침묵과 고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을 때 느껴지는 존재감 또는 의식(지눌스님이 말씀하신 공적영지와 같습니다)이 참나, 즉 우주의 유일한 실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쉬는 젖을 빠는 아기의 상태로 묘사합니다. 이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 잠든 상태, 꿈꾸는 상태의 바탕에서 이들이 서로 다른 상태임을 분간하게 해주는 스크린이기도 합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나와 남의 구분도, 나와 사물의 구분도 없어지기 때문에 비이원성의 상태(non-duality)라고도 합니다.


명상에서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어진 느낌을 체험하는 것이 여기에 유사한 상태이어서 이 때를 '일시적 무상 삼매'라고 합니다. 마하리쉬 님은 이 상태를 끈이 안 끊어진 두레박에 비유합니다. 입문자로서 공부 요점을 반복하면 명상으로 삼매에 대한 체험을 늘리고 호킨스 레팅고 또는 불가의 6바라밀 실천으로 에고를 완전히 지워나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모든 성취가 그렇듯이 단순한 일을 끝까지 반복하는 것이 비결이며 주의할 점은 공부과정에서 '싯디'라고 해서 온갖 신통력을 체험할 수 있지만 그것은 바라지도 말고 거기에 빠지지도 말고 굳세게 앞으로만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프로그램이자 온갖 고정관념, 자기만의 관점(positionality) 등을 모두 버리기 위한 독서를 계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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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5 06:19 공부의 요령과 요점

사람들은 이승에서 1% 또는 5% 안에 들기는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노력하거나 혹은 아예 포기하거나 합니다. 어쨌거나 이런 바람은 모든 이들의 심사에 깊이 아로새겨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의식 세계를 흠모해서 1% 혹은 5% 안에 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예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어제 글을 참조한다면 저는 상자 안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바닥 체험을 하고 열심히 상향의 길로 가서 바라건대는 1% 내지 5% 안에 들어가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승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인 까닭은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목표는 불가에서 화엄의 길이며 평생 화엄경을 번역하신 탄허스님은 '일로향상(一路向上)'을 좌우명으로 삼으셨습니다. 다행히 현대 최고 영성의 한 분이신 호킨스 박사는 의식 지도를 창안하셨는데 이 길을 따라 가면 매우 명확히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의 요체는 명상과 기도, 독서를 통해 에고를 극복 내지 초월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길을 간단히 '소아를 잊고 네 십자가를 지고 오라(마태 16:24)'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오직 에고 극복에 전력을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심진여문 또는 참나쪽에서 해줍니다. 심지어 먹고 사는 일, 세상을 진보시키는 일은 모두 신의 일이니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스승들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하리쉬 님은 "그대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신에게 맡기고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라. 그대를 창조해낸 힘이 세상도 창조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면 이 세상을 돌보는 것은 그의 일이지 그대의 일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세상의 외관은 자기 마음을 투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이 점은 소크라테스가 동굴 안쪽에 비치는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고 설명했을 때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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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06:05 공부의 요령과 요점

혜거스님 얘기 꺼낸 김에 더 풀어보겠습니다. 스님은 가부좌를 할 때도 "나는 지금부터 죽은 사람이다."고 생각하면 다리 저린 것도 사라지고 심장 박동을 듣는 경지가 온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 말씀은 출가한 사람이나 템플 스테이 참가한 사람에게 해당할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나는 이제부터 죽은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진실로 믿는 경지까지 간다면 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의 안목' 또는 '신의 안목'에서 사언행위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호킨스 박사는 완전히 깨닫고 보면 몸은 그저 하나의 물건 혹은 애완 동물과 차별없이 여겨지며 마치 '카르마 태엽'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로봇과 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고등 수학 이론에 따르면 어떤 시스템이든 그 안에서는 계산이 끝날 때까지 옳고 그름과 같은 판단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 에고는 카르마를 다 짓기 전까지는 올바른 길을 왔는지 모릅니다. 에고로만 사는 한 모든 인간이 철저한 바닥을 체험하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간 것을 깨닫는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그래서 소위 '상자 밖의 사고'라는 게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에고를 벗어나는 초탈의 길이지 싶습니다. 초탈한 관점을 얻고 초탈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명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잠시라도 죽었다고 상상해보는 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배운 일상 속의 명상은 가장 편안한 곳에서 편안한 때 편안한 자세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매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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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08:27 공부의 요령과 요점

명상의 특징을 잘 요약해주는 말이 회광반조(回光返照)입니다. 빛을 돌려서 거꾸로 비춘다는 말인데 여기서 빛이란 우리의 의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몸을 가진 우리는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의식을 오감에 집중하여 밖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려 반발하거나 도망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되돌려 안으로 비춘다 함은 의식이 나온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계속 검색하다가 혜거스님이 명상에 대해 말씀하신 걸 보고 반색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탄허스님께 배운 혜거스님은, 우리나라 명상법은 위빠사나와 달리 오관을 닫고 일시적으로 죽는 데 비결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회광반조를 실천하는 비법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영성의 최고봉으로 받아들여지는 마하리쉬는 17세에 우연히 완전히 죽는 상황을 상상으로 체험하고 단박에 깨달았습니다. 명상은 우리가 몸을 버린 후에 어떤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미리 체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매일 시간을 내어 명상을 하면서 한 가지 화두(혹은 기도문)만을 붙잡고 간다면 분명히 매일 진보할 것이며 은은한 기쁨이 점차 잦게 찾아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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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21 06:15 단상

세상과 싸우는 이는 소크라테스가 설파한 동굴의 우화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자와 싸우다보면 지치기 쉽고 분노에 싸여 스스로 병들기 쉽습니다. 더구나 증상과 싸우는 게 되어 잘 개선되지도 않습니다. 그림자를 비추는 실체를 찾아 치유의 손길을 뻗어야 합니다. 그 가장 좋은 길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신제가의 핵은 바로 경(敬)이요 성(誠)입니다. 성(誠)이란 완전한 투명성이고 완전히 투명하기 때문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경(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홀로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매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 조상의 가르침입니다. 이것만 잘 해도 제가(齊家)는 바로 된다는 것이 제 체험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을 위해서는 이미 훌륭한 지도자를 가져봤기 때문에 그들을 본받으면 된다고 봅니다.

오늘날 높은 스펙의 사람들이 부패하고 강자에게 부역하는 시시한 인생을 사는 것은 최치원에서 조식 선생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이 땅의 최고 지성인들이 실천한 이러한 공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엊그제 인용한 글에서 칼 융은 진단하길 “인간은 영혼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가장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서구인들을 병들게 한 요인인데 이러한 자신의 탐욕이 온 세상을 오염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시한 대안이 마하라쉬로 상징되는 동양 영성의 실천입니다. 동양 영성 실천의 핵심이 바로 명상입니다. 이 처방은 천 년 전에 복성서도 반복하고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명상이란 불사불려(弗慮弗思)이고 마하리쉬는 마음을 없애면 생각이 없어진다고 해서 결국 동양 정신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생까지 치룬 공부에 따라 자신이 화약인지 숯인지 젖은 석탄인지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방편을 찾아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면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깨달음을 향해 진전하고 그런 군자가 많이 나와서 그들이 현대 조직의 리더가 되면 바로 세상이 평화롭게 된다(平天下)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전파하는 데 집중하는 것으로 개혁의 대열에 참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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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07:35 단상

10여년 전 읽었던 마하라쉬에 관한 책 '나는 누구인가'를 복습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에 대한 설명을 보면 기독교의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다이몬의 소리대로 살던 소크라테스도 성령을 입은 사람이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하리쉬는 구도자의 근기에 따라 화약-숯-젖은 석탄으로 사람을 나누고 불이 붙는 시간이 깨달음에 걸리는 시간이라 합니다. 젖은 석탄에 해당하는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는 데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 하니 제가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전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편지'에 따르면 이승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될 뿐 아니라 다음 세상으로 넘어갈 때 편안하고 장엄하게 또 자신있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스승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길 의식이 높아지는 자체가 세상에 바로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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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7 11:58 단상

유교와 불교가 수렴한다면 인간의 마음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의 가르침이 하나로 수렴한다면 그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융은 인도학자인 하인리히 짐머가 라마나 마하리쉬에 대해 쓴 책의 서문에서 말하길 “동양적 수행의 목표는 서양 신비주의의 그것과 같다. 동양에서는 초점이 소아(小我)에서 참나(眞我)로 옮겨가듯 서양에서는 인간에게서 신으로 옮겨간다. 이는 소아가 참나 안에서 그리고 인간이 신 안에서 사라짐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아란 대승불교의 생멸문, 참나란 진여문에 해당하는데 현대에 이르러 소아란 몸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개발된 특성으로 이해합니다. 이 소아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넘어설 때 우리 존재의 근원인 참나로 존재하게 되어 모든 두려움과 고통, 불행이 그치게 된다고 하는 것이 제가 파악한 현대 영성입니다. 참나란 신성의 다른 말이기도 해서 신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가 제거되면 사랑과 기쁨, 평화가 들어차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처방에 따르면 생각으로 된 마음, 즉 소아를 벗어나야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데 하나의 방편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 의문의 근원으로 몰입하여 마음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방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완전히 맡겨버림으로써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나는 누구인가, 59쪽). 그 상태는 어린이와 비슷하여서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그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버리면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위 책, 125쪽)고 합니다. 이 점은 동아시아 모든 성현이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한 구절만 가져오면, 맹자는 어린 아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경지를 수양의 목표로 합니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離婁下).

제 생각에 몸을 버린 후에는 누구나 참나 상태가 되지만 우리 의식이 만든, 그래서 환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세상에 대해 유머를 가지고 즐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참나-깨달음 상태로 가는 것이 비결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아주 오랜 동안 우리 몸이 나라는 생각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소위 영적 수행이란 과정을 밟아야 하고 마치 운동선수나 악기연주자처럼 꾸준히 연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연습의 과정이 각 문화에서 영성 수련이라 할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이 ‘학이시습’이라 할 때도 저는 현대적 학습과정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컨텐츠 습득이 아니라 바로 저러한 과정을 말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학의 정수를 실천한 것으로 평가되는 안회가 수제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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