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동서의 수양론

목운 2018. 4. 17. 11:58

유교와 불교가 수렴한다면 인간의 마음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의 가르침이 하나로 수렴한다면 그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융은 인도학자인 하인리히 짐머가 라마나 마하리쉬에 대해 쓴 책의 서문에서 말하길 “동양적 수행의 목표는 서양 신비주의의 그것과 같다. 동양에서는 초점이 소아(小我)에서 참나(眞我)로 옮겨가듯 서양에서는 인간에게서 신으로 옮겨간다. 이는 소아가 참나 안에서 그리고 인간이 신 안에서 사라짐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아란 대승불교의 심생멸, 참나란 심진여에 해당하는데 현대에 이르러 소아란 몸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개발된 특성으로 이해합니다. 이 소아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넘어설 때 우리 존재의 근원인 참나로 존재하게 되어 모든 두려움과 고통, 불행이 그치게 된다는 것이 제가 파악한 현대 영성입니다. 참나란 신성의 다른 말이기도 해서 신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가 제거되면 사랑과 기쁨, 평화가 들어차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님 처방에 따르면 생각으로 된 마음, 즉 소아를 벗어나야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데 첫 번째 방편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 의문의 근원으로 몰입하여 마음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방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완전히 맡겨버림으로써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나는 누구인가, 59쪽). 그 상태는 어린이와 비슷하여서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그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버리면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위 책, 125쪽)고 합니다. 이 점은 동아시아 모든 성현이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한 구절만 가져오면, 맹자는 어린 아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경지를 수양의 목표로 합니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離婁下).

제 생각에 몸을 버린 후에는 누구나 참나 상태가 되지만 우리 의식이 만든, 그래서 환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세상에 대해 유머를 가지고 즐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참나-깨달음 상태로 가는 것이 비결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아주 오랜 동안 우리 몸이 나라는 생각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소위 영적 수행이란 과정을 밟아야 하고 마치 운동선수나 악기연주자처럼 꾸준히 연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연습의 과정이 각 문화에서 영성 수련이라 할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이 ‘학이시습’이라 할 때도 저는 현대적 학습과정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컨텐츠 습득이 아니라 바로 저러한 과정을 말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학의 정수를 실천한 것으로 평가되는 안회를 공자님의 수제자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혁과 동양 영성  (0) 2018.04.21
깨달은 사람  (0) 2018.04.20
명상과 영성의 실천  (0) 2018.04.13
명상과 깨달음  (0) 2018.04.12
영적 수행  (0) 2018.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