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10장(체험적인 것 대 개념적인 것)

목운 2017. 3. 9. 08:05

'안다'는 말에는 '들었다', '배웠다', '추정된다'거나 '익숙하다'는 것처럼 다양한 수준이 있다. 또 '공식적으로 연구했다'거나 '어떤 주제에 정통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앎의 수준은 잠정적, 추정적, 가설적이거나 추측되는 확률 등으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확신의 정도에도 확고한 믿음, 불가피함, 믿을만함 등의 수준 차이가 있다. 각 수준은 체험적 정보를 지적 정신 구조물과 대조해서 파악되는 확실성이나 신뢰성의 정도를 가리킨다.


'무엇무엇에 관하여 안다'는 것은 정보 자체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그 실체와 진실성은 체험으로 확인되어야 하는 상태다. 확실성에 도달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진짜 안다는 것은 '그것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대상과 아는 자가 하나가 된다. '무엇무엇에 관하여' 안다는 것은 마음의 일이며 체험으로 안다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푸딩을 증명하는 방법은 먹어보는 것이다.").


선형적이고 개념적으로 익숙한 삶의 차원에서는 확인하는 일이 비교적 쉽고 실천적인 문제다. 반면 영적인 일에서는 그 전체 과정이 그저 생각, 감정이나 마음으로 짜보는 것이 아닌 오감의 양상을 포함하는, 다르고 미묘한 특성을 말한다. 영적 실체의 확인에는 비선형 실체를 참으로 아는 수단인 의식의 다른 자질과 능력이 개발되어야 한다.


누가 아는 자인가?

에고(소아)가 첫째이고 행동뿐 아니라 의도의 유일한 원천이며 따라서 실체를 판단하는 자라고 보기 때문에 마음은 자신이 진리를 찾는 진짜 '나'라고 순진하게 간주한다. 여기에서 목표의 추정은 물론 동기가 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알고자 하는 동기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이득 욕구일 수 있으나 영적 동기로는 여러 가르침과 노선과 종교의 근본적 진실이 얼마나 확실한지 확인하려는 내적 필요성이 생겨난다. 의미와 진실 및 정신적인 것(영성)에 대한 욕구에는 뇌 생리와 관련한 생물학적 뿌리가 있다(Newberg, 2006).


전통적으로 영적 학습에 기꺼운 마음이 나는 것을 '무르익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진지한 의도에 성숙됨, 의식의 점진적 진화 및 체험적 학습에 대한 욕망의 가동이 더해진 운이 좋은 조합을 가리킨다. 시작은 미미한 호기심으로 했을지라도 영적 학습의 중요성과 그 장기적 결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점차 깊어짐으로써 흥미가 더해진다. 열정이 개발되고 드디어는 몰입하면서 영적 목표와 가치가 점점 세속적 에고의 소소한 목표를 대체하게 된다. 영적 정보의 이용으로 내적 경험과 지혜가 점차 진보하는데 그로써 영적 추구의 동기는 더 커진다. 영적 전제가 점점 체험적으로 생생해지고 '무엇무엇에 관하여 알던 것'이 체험으로 변모하는 덕에 진짜 아는 것으로 바뀌어 확신이 생긴다.


그 진보 상황은 종종 직관과 내적 안내로 치부되는 깨달음의 펼쳐짐과 자동적인 계시로 흔히 묘사된다. 영적 안내가 체험적 실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다. 수행이 진척됨에 따라 소아는 점차 해체되어 참나로 통합되는데 참나에는 에고(마음)가 하는 학습 능력과는 다른 그것만의 능력이 있다.


주권자

에고는 자기애적 중핵인데 스스로가 경험적 실체의 근원이라 생각하고 인정을 구하지만 영적인 길을 밟음으로써 점점 겸손해져서 결국에는 내면에서 감사의 정이 일어난다. 영적인 지향으로 인해 참나는 점점 지배력이 커지며 소아는 더욱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집을 포기하게 된다. 마땅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여전히 모른다고 하는 쪽으로 중점이 바뀐다. 이어서 속에서 인내력이 커지고 저항을 뛰어넘으려는 결단력이 생긴다. 성공에 따라 영적 과정 자체에 대한 능력과 믿음 그리고 확신이 커진다. 소아는 약해져서 점점 사라지고 자기가 주권자라고 하는 환상을 포기함으로써 '상위 권능'의 '임재'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