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무위와 무지

목운 2018. 12. 29. 03:54

제가 보기에 호킨스 박사, 20세기 인도 성자로 여겨지는 마하리쉬와 마하리지, 그리고 도덕경과 금강경의 이상을 공통적으로 엮어주는 경지는 비이원성입니다. 선악 이분법을 초월하여 일자(Oneness)를 체험한 경지입니다. 그 근거는 이들의 체험에서 나온 진술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도덕경 10장의 다른 구절은 논의의 여지가 많아 의견이 분분하지만 달리 해석할 수 없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지만 하는 게 없다고 할 수 있는가(愛民治國, 能無爲乎)이고, 둘은 완전히 꿰뚫어 알지만 모른다 할 수 있는가(明白四達, 能無知乎)입니다. 

앞 구절은 "수없이 많고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만 실로 구제받은 중생은 없다"는 금강경 말씀에 통하며 금강경은 이것을 무위법(無爲法)이라 콕 집어 말합니다. 뒤 구절은 지극한 앎이기도 한 '위없이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이란 앎을 얻은 게 조금도 없는(無有少法可得) 것이라는 말씀에 통합니다. 이 모든 경지는 '내가 없다는 체험(無我法)'에서 나온다는 것을 금강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경이나 금강경의 '무위'란, 실상 세상 구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지만(無不爲), 무언가 했다는 의식이 들지 않는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순은 실제로 우리에게서 아상(에고)이 없어져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예의를 차린 말에서도 드러나는바 무언가 큰 일을 한 사람이 빈 말로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을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아상을 없애는 일은 누차 거론했지만 장자에서는 좌망(坐忘, 大宗師 7장)으로 기독교에서는 자신을 부인 내지 잊어버리라는(마태 16장 24절)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서 공히 아상을 없애는 길은 초월적 도움으로 가능하며 우리쪽에서는 명상을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게 필요합니다. 수많은 지식 습득과 경전 독서가 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루가복음 16장 20절의 어리석은 부자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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