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목욕물 비유와 추상적 계승

목운 2022. 6. 8. 08:23

모레 책거리를 합니다. 어제 출판사 대표님은 출판기념회라고 하시더군요. 정확한 이름짓기입니다만 저는 전통과 접목하려고 책거리라는 말을 썼습니다. 과거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떼거나 필사한 후 자축 겸 스승께 감사하는 뜻으로 책거리를 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어쨌든 오시는 분들께 요점정리를 해드리는 게 마땅할 것 같아서 십여일 전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오갑니다. 무엇보다도 이 블로그 정신을 그대로 엮은 것이 이 졸저이고 드릴 말씀도 같습니다. 제가 염두에 둔 공부 정신 가운데 하나는 마치 두 언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사례입니다. 즉 이승에서 존재상태를 최고까지 드높이기 위하여 신유학과 기독교 가르침을 자유자재로 활용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마치 동시통역자처럼 되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제 생각의 바탕에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과 거기에 딸린 비본질적 요소를 구분하자는 뜻의 서양 속담에 목욕물과 아이의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신유학의 폐해를 보고 목욕물만 버린 게 아니라 아이까지 내버리고 서양의 강대함이 기독교에서 비롯한 줄 알고 서양 아이를 데려다 키운 셈입니다. 하지만 수 천년 동안 이 땅의 최고 지성들이 우리 풍토에 맞게 유불선을 종합해서 만든 한국 유교(저는 신유학이라 부릅니다)는 마치 유전자처럼 우리에게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철나기 전에 기독교 세례를 받아 사실상 서양 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대학 교양과목 시간에 사서집주라는 게 있는 줄 알았고 논어를 말 그대로 교양수준에서 간헐적으로 읽었을 뿐입니다. 언제부턴가 기독교가 왠지 몸에 안 맞는 옷 같이 여겨진데다 서양인들이 기독교를 비판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 와중에 복성서를 접하고 제대로 공부해보니 기독교 진리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욕물이 지독히도 더러워진 기독교에서 물만 내다버리고 아이만 챙기는 노력을 동시에 한 것입니다.

이승에서 존재상태를 최고까지 드높인다는 말을 했는데 수도, 수행, 수양, 수덕 내지 영성수련 모두 여기에 복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봅니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신유학과 기독교를 자유자재로 활용함으로써 제 근거지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된다면 제 공부가 잘 된 것이지 싶습니다. 마치 최고의 동시통역자의 출생지가 어딘지 모르겠는 경지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할 때 중요한 원칙 하나만 거론하자면 경전을 읽을 때 추상적 계승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공자께서 지금 이 시대를 사신다면 결코 하실 것 같지 않은 말씀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분은 분명 당신들이 사신 세상의 한계를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앞서가는 제자가 나오길 바란다는 취지의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분들 정신을 계승해야지 당대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사용한 말까지 그대로 고수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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