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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종심소욕불유구

어제는 아들 생일 축하를 위해서 외식을 했습니다. 해주고 싶은 말이 다음과 비슷한 말이었던 것 같았는데 변죽만 울렸습니다. 제 경우도 그랬지만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데다 주변 사물과 사람이 거의 언제나 짐스럽게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서 좀더 나은 환경이나 신분, 혹은 조건을 위해 끝없이 움직이려는 동력을 느낍니다. 간단히 다르게 표현하면 언제나 갈등 상황입니다. 옮기는 것은 호킨스 박사 말인데 이분도 성공의 꼭대기를 체험했고 무신론 생활 중에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고백한 적 있지요! "주관적으로 보면 진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인내, 기도, 과정에 대한 굳센 믿음, 그리고 저항하길 그치는 것이다. 날씨 변화처럼 혼란은 인내로 사라지는 조건이자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조건이며 다음 단계에서..

단상 2019.03.14

명상의 목표

출근 전에 10여분이 남아 시간 활용에 가장 좋은 명상을 했습니다. 마음의 풍경이, 그냥 앉아 아무 생각없이 쉬는 것 하고 자명 시계를 걸어놓고 명상하는 것 하고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명상을 해본 분은 아실 겁니다. 명상은 내면으로 향한다는 분명한 의도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엊그제 썼지만 BE, DO, HAVE 가운데 BE, 즉 존재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과업이며 동아시아의 제대로 된 지성은 모두 이것을 최대, 최우선 과업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존재 상태를 끝없이 향상시켜 가는 이유는 천인합일을 이루는 것이고 힌두 전통에서는 비이원성에 도달하는 것이고 서양 신비주의에서는 신인합일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인간 마음이 동서 불문하고 같다면 결국 모두가 한 지점에서 만날 것이라고 봐도 틀리지 ..

단상 2019.03.08

어떻게 살까?

인문학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도록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아서 비슷한 소리를 계속 달리 말해 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Σ(BE+DO+HAVE)입니다. 빠진 게 있을까요? 편의상 BE, DO, HAVE를 1, 2, 3으로 표기합니다. 젊었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2와 3으로 미루어 1을 짐작하거나 2와 3에 열중하다 보면 1이 해결되는 것으로 아는 게 보통입니다. 한편 1에 인작과 천작이 있다고 본 분이 맹자입니다. 공경대부 같은 세상의 신분이 인작이고 끝까지 선을 추구하는 것(樂善不倦)이 천작입니다(고자 상). 사실상 외견을 구한다는 점에서 인작은 2나 3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천작을 추구함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인작이 다라는 생각을 ..

세상을 바꾸기

어제 '무위-무불위'와 '무주상보시'가 같은 경지라고 썼습니다. 이 경지는 기독교에 오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는(마태 6:3)' 경지라는 게 직감되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가는 데 핵심 노하우가 '소아를 잊기(마태 16:24)'입니다. 노장에서는 '좌망'으로 불가에서는 '무아'로 표현됩니다. 그 과정에서 마치 운동선수나 연주가가 매일 연습하듯 실천하는 게 유가에서는 내성 또는 반구제기이고 불가에서는 계정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경지에 가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범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산은 똑같은 산이지만 내면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혜능의 경우 똑같이 마당 쓸고 부엌일을 했지만 스승이 알아 봤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군자와 성인의 차이

이미 세 번에 걸쳐 소개한 '유교 명상론'은 공부하는 사람의 성장 삼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세에 공부에 뜻을 세운 때부터 학인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공자님이 거론하신 나이는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꼭 나이대로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학인의 경우 보시 기타 선을 행하려 하지만 잘 안되는 경우입니다. 엊그제 썼지만 불혹이 되면 선을 선택하는 데 흔들림이 없어져 군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위 책에서 배우는 것은, 유교 명상에서 거경궁리 또는 계신공구를 거쳐 '한다는 의식 없이' 선에 항구한 경지에 도달한 때를 성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경지가 도덕경의 무위-무불위, 금강경의 무주상보시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군자에서 성인으로 가는 노하우가 각 영성에 있지만 공통점은 '내가 있다는..

종심소욕불유구에 이르기

늦어도 칠순까지 제 자식을 포함한 뒷세대한테 쓸모있는 수행서를 내는 게 목표라서 읽고 쓰는 일의 과반수가 여기에 바쳐집니다. '유교명상론'을 공부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주희를 전후한 신유학자들의 목표는 작위(作爲)가 없이 보시행을 할 수 있는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이 경지는 다름 아닌 도덕경의 무위와 금강경의 무주상 보시를 행하는 경지라고 봅니다. 대개의 신유학자들은 불가에서 먼저 공부를 했거나 텍스트로라도 선가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그럴만한 일입니다. 이미 서술했듯이 선불교는 도교와 불교의 융합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쨌든 위 책을 지은 정은해 님은 유교 명상의 목표가 반성의식의 정상적 작동을 거쳐 결국에는 반성의식의 소멸한 경지에 있다고 하며, 전자는 공자님의 학습단계 가운데 불혹에 해당하고..

현상학 용어로 본 명상

새벽 두 시쯤 잠이 깼는데 잠이 잘 안 와서 궁여지책으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단 몇 분이라도 정좌를 하다가 누우면 잠이 잘 오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시간에 맞추어 놓고 조금 앉아 있다가 누웠더니 역시 일어날 시간에 벨이 울리면서 기분 좋게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하면 왠지 두어 시간 명상을 한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엊그제 소개한 정은해 님에 따르면 명상이란, 현상학 용어로 대상에 대한 지각 작용인 대상의식을, 반성의식으로써 무화하거나(불교의 경우) 정화하는(유교의 경우) 일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불교의 좌선은 '관조적' 반성의식으로 대상의식의 해석작용을 무화시키는 반면, 유교의 정좌(언제나 깨어 있음)는 '규제적' 반성의식으로 대상의식의 해석작용을 정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기독교는 반성의식의..

유교 명상론

정은해 님의 '유교명상론, 불교와의 비교철학'을 훑어보니 결국 수행 또는 수양에서 핵심이 되는 실천이 명상(좌선, 정좌)이며 유교 전통을 계승하는 학자들이 명상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유교 명상 방법론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주희와 왕양명을 비교하고 또 이들의 방법론을 불교는 물론 하이데거와 후설의 현상학으로 재조명한 점이 이 책의 얼개이자 특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600여쪽이나 되는 책 내용은 복잡다기하지만 부록으로 붙인 정이천, 왕양명, 이연평, 주희의 명상 요지를 보니 결국 유교 명상법도 요즘 동서 영성에 보존 전수된 방법과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수승화강의 호흡법을 기본으로 차크라를 따라 기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 정좌해서 내면에 떠오르는 부정적 사념을 대처하며 없애는 것,..

명상, 어떻게 하나?

유튜브에서 중국어 공부를 하다보니 그밖의 제 관심사가 나오면 클릭하게 됩니다. 어제는 서양인인 알렉스란 친구가 능숙한 우리말로 명상 기타 자기관리법을 가르치는 걸 봤습니다. 인상깊은 몇 가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저도 겪었지만 명상을 처음 습관들이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10~20분부터 시작해서 원하는 시간만큼 늘려가는 것이 비결이라는 겁니다. 둘째는 저도 거론했지만 큰 기대없이 양치질하듯 일상사로 만들라는 겁니다. 명상중 그저 무엇이든 오고 가는 걸 바라보는 게 요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데 특히 지혜와 감각이 좋아집니다. 스트레스와 근심걱정이 줄어드는 건 기본입니다. 셋째는 가장 처참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느낄 때가 가장 명상이 잘 된 때라는 것입니다. 제 경우 이젠 그런 때가 잦아..

죽기 좋은 경지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에 대해 똑같은 협주곡을 천 번 작곡했다고 했답니다. 저도 느끼지만 사계만 들어도 비발디 음악은 다 들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동네에 비발디 아파트가 있는 것처럼 아주 먼 나라 사람들의 현재 삶에까지 강렬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이곳에 쓰는 글들은 실상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것입니다. 즉 이 세상 삶은 물론 다음 생까지 잘 돌보고, 그래서 참 잘 살았다는 보람을 느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대한 답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란 확신이 들도록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합니다. 삶은 여정이고 그 여정은 이승에서 '곧고 좁은 길'을 끝없이 올라가는 일이라는 게 스승들의 가르침..

단상 2019.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