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요령과 요점

무지에서 벗어나기

목운 2023. 2. 17. 12:47

상당 기간 소득거리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판단이 틀렸다는 걸 확인하는 데 7개월이 걸렸다. 한 달을 쉬면서 공부를 잘 한 셈인데 한두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첫째는 바깥 형편이 잘 나갈 때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인데 그럴수록 더 신 의식에 의지하며 매순간 여쭈면서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형편이 어려워져야 비로소 존재의 근원에 간절히 비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번에 끝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내적으로 제법 높이 가서 우연히 싯디를 체험할 때 루시퍼처럼 크게 추락할지 모른다. 오늘 읽은 '신비주의의 역사'에서도 "참된 구루란 신 앞에 자신의 비천함을 방심하지 않고 바라보는 자"라고 하여서 그런 생각을 지지해주었다.

두 번째는 밖으로 무엇을 성취하거나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것은 무지의 소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비롯한 스승들이 '천국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안다면 매사 그 순서는 거꾸로 됨이 마땅할 것이다. 즉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신성과 접촉하고 나아가 완전히 하나임을 안다면 세상이 요청하는 바대로 신성을 드러내며 살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유지 존속을 위해 심어졌을 뿐인 '결합-배척'의 본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신성을 잊게 했던 모든 프로그램을 초기화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몸이 이번 생을 헤쳐나가며 해야 할 과제를 후회 없이 수행하기 위해서 아주 작은 일까지 신성에게 물으면서 여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만 위에서 '안다면'이란 말을 두 번 썼는데 듣거나 읽어서 아는 것과, 앎이 내 존재가 되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이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 점을 강조하느라 논어는 조차전패(造次轉沛)라는 말을 쓴 것 같다. 그렇게 되기까지 필요한 것이 수행인지라 중용도 천명을 따르는 솔성을 위해서는 닦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하고 그것이 다름아닌 교(敎)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누구나 지난 생에서 성취한 만큼의 근기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마하리쉬 님은 그것을 땔감에 비유해서 대략 셋으로 나눈다. 즉 화약과 숯, 그리고 젖은 장작이라 하셨는데 생각해보니 장작도 젖은 장작에서부터 숯까지 천차만별할 것 같다. 어쨌든 젖은 장작이란 하근기를 두고 하는 말씀일 텐데 하근기의 경우 백성욱 선생에 의하면 골인 지점인 누진통까지 9천 일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저 부지런히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