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대속론과 깨달음 수행

목운 2021. 2. 20. 09:54

페이스북에서 친구분 글에 댓글 달고 답글을 얻은 김에 희론을 벌이고 싶어졌습니다. 희론이란 실상 학문적-비학문적 모든 논설입니다. '언어도단 심행처멸'을 추구하신 황벽선사께서 극복하고자 초지일관 노력한 것이 희론이었습니다. 이 점은 또한 교외별전에 치중한 불교전통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선종이 교종과 서로 보완한다는 게 보통 수행자에게 답입니다).

각설하고 40년 가까운 가톨릭 생활에서 끝까지 석연치 않던 게 대속론인데 우리 지성 역사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노력을 다석 선생이 하셨다는 것을 이정배 님 글에서 알았습니다. 저는 영국의 보통 사람이 쓴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고 대속론이 엉터리라는 걸 확신했습니다. 즉 유태인들(실은 그 정도 의식 수준의 지구상 모든 부족들)이 동물의 피를 바쳐 신의 진노를 면하려 했던 제사가 대속론의 기원입니다.

여기서 동물 대신 사람을 쓴 예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던 설화뿐 아니라 잉카를 비롯해서 어디에서든 유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게 잘못임을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 더 이익이 되는 때문에 미사 예식에서 예수의 진짜 피와 살로 제사를 지낸다는 스토리를 지금까지 고수하는 게 가톨릭입니다. 그리고 나서 구원은 해결됐으니 식민지 개척하고 제국주의 정복과 살상을 밥먹듯 저지른 것이 서구 강대국들입니다.

인간의 편의주의는 간교하기 때문에 동양도 오십보백보인 것이 인명살상을 직업삼아 하던 사무라이들도 사후 구원은 아쉬웠기에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된다는 정토종이 일본을 휩쓸었고 이들의 정신이 꽃(?)을 피운 게 군국주의 전쟁 범죄입니다. 선불교는 거기에 부역해서 가미가제 순국이 바로 부처의 환희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고무했지요~

결론은 제가 댓글에서 쓴 대로 구원(모든 고통을 벗어나 궁극의 지복을 누리는 것)이란 초자연적 원천의 도움, 즉 은총에 기대어 스스로 '존재의 근원'과의 합일을 확신하게 된 경지라고 보며 거기에 이르려면 그에 합당한 노력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제가 아는 은총론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은 기존의 기독교 구원론은 아예 폐기하고 은총론과 함께 치열한 깨달음 수행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상 이 또한 희론이며 진짜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도덕경의 말씀까지 써야 마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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