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인성과 부활론의 허구성

목운 2021. 1. 23. 04:53

“‘우주의 창조 차원’ 입구까지 진동주파수가 상승한 ‘개체 의식’은 <개체화된 빛>, 즉 <개체화된 의식>이 되는데 이 <영광스러운 의식>은 지고의 <영적 세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누리는 데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가 알기 바란다. 그것은 에고를 높이 초월하지 못한 이들이 경험하는 욕구와 욕망과 충동 따위가 없는 존재의 지극히 황홀한 상태다.” (205쪽)

교회 다닐 때 그리스도가 완전히 사람이면서 신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그 전지전능함에 대한 생각이 압도적이어서 인성에 대해서는 잘 와닿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특별히 유월절을 기념하여 모인 최후의 만찬 전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 대한 실망과 자신에 대한 의심, 그리고 두려움 등을 고백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특히 본의 아니게 무화과나무를 죽인 일에 대한 후회도 언급됩니다. 배가 고파 무화과 열매를 먹고자 하였으나 철이 지나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에게 화풀이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영적 힘이 높아져 있었기에 그 말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영적 힘이 높지 않더라도 생각과 말과 행동의 힘은 카르마 법칙대로 구현된다는 것도 덧붙여집니다.

그러니 우리도 공부가 진척될수록 항상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살펴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특히 험담이나 앙심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193쪽). 이어서 성전에서 가르침을 베푸는데 환전꾼들의 소란 때문에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이 이탈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도 모두 카르마 법칙이 구현된 것임을 말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는 이집트인들과 짐승의 맏이를 죽게 한 복수극에 대한 도취감, 생명이 있는 동물을 죽여 창조의 업적을 해쳐도 상관없다는 관습을 떠올리면서 제자들에 대한 비꼬인 감정이 생겼고 그 관습을 시정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기억을 오래 해주길 바라면서 다만 상징으로 이용했던 빵과 포도주 예식 등에 대한 설명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초월의식에 도달한 상태에서 “의식을 하강시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 대한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다시 몸으로 들어가는 일을 누추한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불쾌한 것이었다는 증언을 읽었던 게 생각납니다.

위 말씀은 육신의 부활이 부질없는 것임을 강조한 것인데 ‘우주의 창조 차원’이란 이 책에서 궁극의 평형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거기에서는 개체성이 상실되기 때문에 바로 그 입구까지만 상승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다음 차원까지 의식이 진화하기 위해서 에고의 욕망과 충동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식이 상승하는 것 자체가 세상 구제에 가장 올바르고 유익한 길이라는 게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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