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기

목운 2024. 1. 27. 17:53

오늘은 마하리지 말씀을 옮기다가 그분이 사람들을 보통 사람과 인도말 'jnani(발음을 모릅니다만 깨달은 자를 뜻하는 것을 압니다)'로 나눈 것을 저는 중생과 보살로 옮겼습니다. 결국 인도 사상이 중국울 거쳐 진화한 것이 한국 불교입니다. 한편 오늘날 마하리쉬 님과 마하리지 님을 비롯한 인도의 스승들이 서양에 널리 전파되어 영미 영성가들 다수가 인도 영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서 현대 서양 영성을 우리 불교로 잘 풀어내면 다른 케이 컬처처럼 케이 영성이나 케이 철학도 가능할 것이라고 느낍니다.

각설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크게 나누어보면 죽음에 대해서 거기에 직면해서 생각할 일로 치고 세상 일에만 몰두하면서 사는 사람과 어떤 계기로 죽음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살아가려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의 경우도 약간의 뉘앙스 차이에 따라 그저 세상 처세에 능통하여 잘 적응하며 세상에서 번영하며 평화를 누리려는 사람과 크게 성공하여 이름과 영예를 드날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저는 중생의 삶이라고 봅니다.

후자의 경우 결국 대동소이하지만 표현상 두 가지로 써보려 합니다. 하나는 세상을 만끽하고 기쁨과 웃음 속에 살지만 이승과 저승에 차별을 두지 않는 사람과 또 하나는 전적으로 자유롭고 무한히 성취하며 초월적 환희를 누리지만 이승에 아무런 집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들과 같은 사람이 바로 불가에서 꿈꾸는 보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강경에 따르면 보살과 중생의 경계는 이승의 모든 것을 허상으로 보느냐에 있습니다. 즉 죽음이란 시간과 공간상의 변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살은 이미 모든 모습, 즉 상(相)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렇기에 보살에겐 시간과 공간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마음에 관한 일이고 마음 자체가 없어진 것이 보살입니다. 유가에서는 갓난아이 마음(赤子之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맹자님은 갓난아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 바로 대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불선의 디엔에이를 물려받은 저에겐 보살과 대인이 같게 느껴지며 결국 진정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화엄경이 안내하는 보살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위에 거론했듯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는 게 공부의 목표가 아니라 그 바탕에서 세상에 신 또는 우주마음을 한껏 펼치면서 초월적 환희를 누리고 세상을 만끽하는 것이 참된 보살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끌어당김과 수행공부  (2) 2024.02.01
언제 깨달을까  (1) 2024.01.31
생각 중독과 가운데 길  (1) 2024.01.26
잘 되는 것과 잘 있는 것  (0) 2024.01.22
삶의 제일 과제  (2) 202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