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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재(三災)와 수행공부

돌아보니 세상 삶을 지탱해주는 세 가지, 즉 건강, 경제, 인간관계에 전혀 문제가 없을 때는 수행공부 또는 깨달음이나 영성에 대해 공부란 그저 멋부림이나 지적 허영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면에 아무 문제 없고 저 세 부문에 문제가 없는 분은 행복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몸을 벗고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는 일에 자신이 있는지 자문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경우도 영악한 세상은 해법을 제시하는데 기독교 '대속론'과 아미타불 신앙을 설파하는 정토종 계열이 그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해결 끝'이라고 해서 살상을 일삼던 사무라이들이 좋아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물론 전자의 극치는 면죄부 구매를 통해서 연옥 징벌을 감면받는다는 생각이지만 오늘날 대부..

단상 2019.11.10

신비체험 사례 3

마지막 부분 인용하고 합일체험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갑자기 나는 몸에 대한 감각이 아주 없어졌다. 소리도 못 느끼고 시각도 없었다. 촉각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이 상상해 볼 수도 있는 충만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상상밖의 것이었다. 내가 체험한 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환희였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어서 인간으로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사랑과 환희다. 그리고 이것을 '느끼는' 것은 나, 지아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주객이 없고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상태였다. 끝없는 사랑과 환희의 무한한 대양이 나를 완전히 감쌌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놀랍게도 '내가 그것'이기도 하였다. 나는 없고 그것이었다. 그것을 '체험하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나는 없었다. 내..

신비체험 사례 2

어제에 이어집니다. "나는 고요히 앉거나 심지어 누워서 그저 내 안의 한 점에 집중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깊이 느끼곤 했다. 나는 어떻게든 내 안에 있는 한 점에 내 의식의 초점을 모을 수 있다면 나를 뛰어넘는 어딘가 먼 곳에 있는 무엇인가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는 바의 그 사랑과 연결되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매일 그렇게 했다. 그러자 어느날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넘어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날 그 어느때보다 강렬히 집중해서 명상을 했는데 '무한에 이르겠다'는 내적 열망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두 시간째 됐나 싶은데 내 몸은 엄청난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깊은 평화의 느낌이 나를 감쌌고 나는 거의 무게를 못 느끼며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이 생..

신비체험 사례 1

오늘부터 앞에 소개한 책을 쓴 분의 신비체험을 소개할까 합니다. 주지하시듯 서양철학의 기원은 소크라테스고 그 가르침은 플라톤이 집대성했습니다. 플라톤을 계승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베푼 사람이 플로티누스고 플로티누스의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을 통해서 기독교에 깊이 심어져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서양철학이 기독교에 깊이 심어질 수 있었던 것은 플로티누스의 신비체험, 즉 일자와의 합일체험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가 아니었던 플로티누스의 체험이 기독교에서 신인합일 체험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는 탈기독교 추세에 맞추어 다시 플로티누스의 일자와의 합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읽힙니다. 우리가 여행담을 쓰는 것은 남들도 똑같은 환희와 놀람을 체험했으면..

평생 해야 할 공부

5~6년에 한 번 꿀까 말까 한 불쾌하고 지겨운 꿈을 꿨습니다. 몸까지 반응하니 아주 생생한 현실과 다름 없습니다. 교훈이 있다면 지금 오감으로 경험하는 현실 또한 꿈처럼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앞에 이어 정좌(환상과 선입견을 덜 일으킨다는 점에서 명상이라는 말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에서 지향하는 바를 적어볼까 합니다. 어제 적은 요령은 결국 에고를 끊어버리거나 소멸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융의 노선에 따라 저항하는 것은 지속되기 때문에 오히려 확실히 인정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하심(下心, letting go)하기 쉽습니다. 스승들의 말을 종합하면 정좌에서 지향하는 것은 첫째 몸과의 동일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제 꿈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은 어떤 목적에 기여하기 위한 교자재처럼 리..

단상 2019.10.28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2

친구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뭐하냐고 하길래 정좌를 30~40분 하고 책을 읽거나 쓰는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6년 전 커다란 좌절로 인해서 사서삼경과 기독경의 정수가 되는 가르침대로 살게 되었는데 따라서 그 일이 수업료로 아깝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읽는 "Reality Unveiled"는 저 가르침을 다시 확인해주면서도 마음에 깊이 와닿는, 참신한 서술방식이 깊이 끌려서 나눠보고자 합니다. 요새 영성의 추세는 양자역학과 첨단 물리학의 성과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게 대세 같이 느껴지는데 요컨대 진짜 실체는 의식이며 의식의 진동주파수가 무한다양하게 드러나 보이는 게 우주고 진화현상이라는 것입니다.그러면서도 정좌(靜坐)와 영적 독서(Lectio Divina)가 공부의 핵심이라는 것은 그 어떤 ..

단상 2019.10.28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1

며칠 전 문래역 근처에서 가졌던 고교동기 친목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10년 전쯤 일찍 은퇴하고 전원생활 하는 바람에 참석이 뜸했던 모임입니다. 이번 장모님 초상 때 대거 참석들 해주어 빚진 마음에 참석했습니다. 은퇴가 늦은 친구 가운데 교사 하던 친구는 작년에 퇴직했고, 교수 하는 친구는 내년에 퇴직을 합니다. 전문직 외에는 거의 다 은퇴해가는 나이입니다. 그러니 건강 얘기가 주(主)고, 관련해서 잔존 수명 얘기를 하게 됩니다. 한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임종에 대한 자세를 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6년 전 모든 게 실패한 것처럼 보여 죽고 싶었으나 전혀 준비가 안 되었음을 느낀 후로 '그때 죽은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게 살자, 어제 죽은 것보다 오늘 죽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살자'..

단상 2019.10.13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제 짧은 공부로 이해하자면 성리학의 원조를 주희로 본 것이 혼란과 정체의 원인이지 싶습니다. 그 절정은 송시열이 주희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윤휴를 처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고 선생을 성리학 또는 신유학의 원조로 보면 저런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노력은 15~16세기의 왕양명에 이르러서 겨우 이루어졌습니다. 주희와 왕양명이 갈리는 가장 뚜렷하면서도 심오한 부분은 바로 격물치지의 해석입니다. "주희는 마음의 지식을 극진하게 하는 것을 '치지'로, 마음이 사물의 이치의 극진한 곳에 이르는 것을 '격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양명은 '치지'의 지를 지식이 아닌 양지로 보았습니다. (정은해, 유교 명상론, 440쪽 참조)" 그래서 양명은 '치양지'를 핵심 실천요..

단상 2019.09.25

공부의 네 단계

6년전 제대로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제 공부는 은퇴후 공부로서는 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공부는 어쨌든 경쟁사회에서 성공을 우선으로 여기는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과거 관성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계속 설파하는 이 공부의 목표는 이 세상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보다 몸을 벗은 뒤의 안전을 구하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목표인 공부입니다. 즉 "신의 안에 있는 궁극적 의식과 앎이 바로 입니다. 이 로써 무한한 보호가 있는 무한한 안전과 무사함이 보증됩니다. 고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공부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만 아니라 이 공부의 결과 의식이 진화하고 향상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앞 글에 이어 글쓰기에 대해 풀어보려 합니다. 강원국 님이 1,500여 개를 쓰고나서 자신감을 얻었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지난 5~6년 동안 7백여 개의 글을 썼으니 앞으로 7~8백개를 더 쓰고 '내 책 쓰기'에 도전할까 합니다. 조선 선비들의 글쓰기는 바로 삶의 공부, 특히 유교적 수행의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제 글쓰기도 수행의 이면이자 연장선상의 작업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일이 기법(skill)의 수련이라고 본 점에서 에카르트 님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동서양이 같습니다. 채근담은 달사(達士)라고 했고 영어의 'skillful'에는 깨달은 자란 뜻도 있습니다. 이 일에는 매우 단순한 일의 엄청난 반복이 필요하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