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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위로의 원천

비록 1차 대학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면접에서 무얼 전공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철학'이라고 답한 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은퇴후 가장 호젓하고도 뜻있는 시간을 보내는 두 달 반이 지난 지금 어쩌면 제대로 철학을 한다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저런 답을 한 동기는 짐작컨대 10대후반 육신과 정신의 갈등 속 나름 고통스런 실존 문제를 해결코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달 내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으면서 13-14세기를 사신 그분이 부딪친 문제도 바로 사람들의 실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만난 '신적 위로의 책'도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설교 내지 강론의 하나인데 집필 동기가 바로 세 가지 인생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바로 손재수와 이별수, 그리고 건강 문제..

명상의 효과

어제 '정좌(靜坐)'가 무엇이냐고 물어주신 분이 계셔서 제 글쓰기가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좌는 유교 체계 내에서 명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천은 같아도 말이 문화적 DNA를 그대로 달고 다니기 때문에 어휘 선택이 중요합니다. 명상이라고 하면 나름 떠올리는 선입견으로 판단하거나 심지어 하지도 않으면서 '다 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조건 시간을 내서 10분씩 앉아 있자고 크게 결단하고 1년이고 2년이고 행하다보면 동서양 신학과 철학 등등에서 말하는 진리에 다가가게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경전 독서가 그 보조 수단으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교문화권에서는 제사로 때우는 것이고 기독교 문화에서는 미사 참석이나 설교 듣기로 퉁치는 것입니다. '격물치지'도..

단상 2019.12.19

반일정좌 반일독서

요즈음 퇴직 무렵부터 '반일정좌 반일독서'를 실천했다면 수십년의 삶을 아꼈을텐데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주희가 송명이학을 집대성했지만 그가 정좌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작업들이 생명력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주에서 돌아와 다시 도시생활을 하면서 일하는 시간외에는 독서만 하다가 약 2년 전부터는 정좌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검색하다보니 '반일정좌 반일독서'는 주희가 곽덕원이라는 제자에게 처음 한 말인 게 확실해 보입니다. 주희는 반나절을 정좌하고 반나절을 독서하되 1, 2년을 지속하면 모든 우환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만물의 이치를 탐구(궁리라고 하는데 격물치지와 같습니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이 궁리로써 마음을 비우고 근심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경우..

단상 2019.12.18

윤집궐중의 실천

제가 기회 있는 대로 종교와 언론을 비판하고 학교와 사회 탓을 하면서 그것들이 '되는(becoming)' 일에 정답을 찾아 가르치지도 실천하지도 않고 유사품에 만족하기 때문에 답을 못찾는다는 요지의 글을 자주 썼습니다. 우리가 유교의 세례를 받아 의식 무의식에 그 문화 DNA를 간직하고 있으며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영향을 듬뿍 받았음에도 그러한 정신들이 세상에서 득을 보는 일에 기여하는 데 그침으로써, 달리 말하면 그것들이 그저 지배 내지 통속(通俗)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그침으로써 (즉 이데올로기로 기능함으로써) 뚜렷한 한계를 체험하다 못해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시사했지만 그 이유는 가르침을 끝까지 철저히 제대로 실천하는 이들이 극히 소수에..

단상 2019.12.14

헐리우드와 코카콜라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고 언론이 자본의 장단에 춤추는 현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모세가 금송아지 숭배집단을 내칠 때에도 있었던 일이 아닌가요? 활자매체가 자본의 이익에 맞추어 계속 허구를 지어낸다면, 영상매체는 계속 감각의 즐거움을 부추김으로써 사람들을 가시계에 묶어 놓습니다. 이런 현상을 언론학자 기틀린은 아주 간략하게 요약했으니 즉 '미디어란 헐리우드와 코카콜라다!' 즉 눈을 홀려 물건 사도록 부추기면서 사람들을 땅에 단단히 묶어놓는 것이 미디어가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불멸하는 '의식'이 본질이고 그 의식을 가시계에 비추어낸 것이 몸과 에고와 소위 문명이건만 미디어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끝없이 저항할 뿐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문명은 언제나 절멸 위기를 피하지 못하며 미디어는 오늘도 거짓..

단상 2019.12.13

정좌(靜坐), 좌선(坐禪), 정관(靜觀)

제 아이들과 조카들에게 기회 닿는 대로 '너 자신이 잘 되는 것이 효도다', '네 상태가 최선일 때 효도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해줍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무엇을 해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식이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 효도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부모의 바람은 자식 '잘 되는' 일일 겁니다. 그런데 잘 되는 일을 학교와 사회에 맡겨버림으로써 조금씩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배워 깨닫겠지' 하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하는 이유는 그 기준을 가시적인 데서 찾아버릇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회입니다. 소위 언론, 요즈음은 주로 티브이와 유튜브에 맡기는 셈입니다. 서양식으로는 내면에서 신을 찾아 스스로 신이 되는 것, 우리 식으로는 천하지대본인 중(..

단상 2019.12.12

그리스도의 2014년 메시지 2

그러면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우선 너희 모두 각자가 명상하면서 신 의식에게 가야 한다. 명상이란 말로 나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너희에게서 너희 삶을 스스로 감당하려는 의지를 비울 것을 의미한다. 너희 마음에서 우주의 방대함으로 뻗어나가 너희를 존재케 한 거기에 접속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감고 앞 이마 꼭대기로 들어올려라. 세상이 마땅히 취할 모습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고무되기 위하여 신 의식으로 채워지기를 구하며 너희 의지를 포기하라. 신 의식과 접속하는 동안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명상을 마치자마자 영성 일기에 그 아이디어를 써 내려가라. 누구나 그 영성 일기를 써야 한다. 모든 사람과 무조건적 사랑을 나누는 삶의 실상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하라.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네 삶은 어..

그리스도의 2014년 메시지 1

더 높은 이상 너희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더 높은 이상이 필요하다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더 높은 이상을 어떻게 성취하고 어떨게 드러낼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이 약속을 성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말을 마음에 새기는 사람을 많이 보았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 구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더 높은 이상을 창조하려는 이러한 요청의 결과 아주 큰 사랑이 드러나서 이제 너희들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시작하도록 내가 다시 오는 게 긴요하다. 너희가 역사책의 도움과 또 여러나라 및 여러 세기에 걸친 유명 작가 및 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지구상에서 지난 50만 년에 걸친 각 인간의 발전을 돌아보면 사상과 생활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유럽의 지적 전통

이 복잡한 인물을 찬찬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 지적 생활의 진화에서 그가 결정적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클레멘트 4세가 1267년에 도미니코회로 하여금 여성 종교 공동체에 대한 사목을 맡도록 했는데 그때 비로소 설교 목적으로 독일어를 쓰게 된 것이며 그 이전에 모든 지적 사상은 라틴어로 쓰였다. 도미니코회 첫 세대의 업적이 무엇이었든(그것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차세대에 속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에서 유럽의 평민 언어로 된 수준 높은 철학적 신학적 논의의 상당량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은 초유의 환경으로 기록될 텐데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의 뛰어난 철학과 신학 전통의 비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참말로 에크하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방법론(2)

에크하르트 양식의 표현에서 더 나간 요소는 '이상적' 입지에서 이야기하기 좋아한다는 점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이미 신과 합일한다면 '진실일'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다. 그가 언급한 대로 '신의 안목'에서 보고 그것이 청중의 독자적 실체인 듯이(강론 11)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의도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강론 22)와 같은 강론은 그런 말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청중들에게 그들이 창조되기 전처럼 되라고 촉구한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받아 들이도록 의도한 게 아니라 청자들 앞에서 그들 본성의 초월적 가능성을 취하도록 한 시도이며 그런 것들은 또 에크하르트 자신이 한 때 '강조해서 말하기'로 인정한 것에 속한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신을 향한 돌파는 지식의 돌파다. 낮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