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정복성

4장 3

목운 2015. 3. 3. 20:10

에고(마음)는 새로운 것에 끌리고 따라서 재미있는 형상과 감각을 열광적으로 추구합니다. 언제나 현존하며 그저 주시하기만 하면 되는 고요하고 형체없는 바탕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써 저런 상황을 거부하고 대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요한 배경이 없으면 소리를 분간할 수 없는 것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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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불가피한 것들을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종교적(영적) 회의주의자라 하더라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본적이고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생명의 내면적 특성인 인식 능력과 의식, 그리고 주관성이라는 바탕이 존재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없으면 개인은 "알지"(즉 자기가 "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의식이란 그 존재의 내용물과 관계없는 존재의 '선험적(a priori)'인 알아차림 자체입니다. 그리하여 (붓다께서 권하신 바대로) 애써 <신성>에 이르려 하지 않고 의식 자체를 자명한 실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존재함"을 아는 것은 초월적 특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저 "존재하는" 것과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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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감각에게 그 주관적 실체감을 부여하는 것이 참나의 광채인데 이것이 바로 <현존>으로서 솟아나오는 <실체>의 근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추구하려면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자아정체감과 합치하는, 내면에 존재하는 성질을 찾는 게 유익합니다. 주관성의 원천(이는 "누구"라기보다 생명체의 내재적 특성[즉 "무엇"]임)을 찾는 것은 아마 그보다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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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라는 게 주관적입니까 객관적입니까? 어떤 지점에서 내면을 향하는 마음은 마음에 관한 진실, 즉 '나는 어떻게 아는가?', '내가 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 '내가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이 실제 진실한지를 나는 어떻게 아는가?' 등에 더하여 '생명은 언제 생겼으며 그 기원은 무엇인가?' 등에 관하여 곰곰히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관적 상태는 비선형적이며 시원(始源)에 이르는 '선험적'인 것입니다. 이 비독자적인 장에서 매우 독자적인 "나"라는 감각이 생겨납니다. 이 나라는 감각이 가장 1차적인 내용물입니다. 이 기초적이고 주관적인 "나"라고 하는 감각이 '나를 안다'고 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기임을 아는 능력인 반면 이에 대조적으로 마음은 그저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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