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초기 삶과 광야 체험

목운 2018. 5. 22. 07:18
나는 세례 요한에 대한 소문을 통해 그의 말을 들으려고 멀리 예루살렘에서까지 찾아든 유대인들에게 그가 무엇을 해주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가서 세례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요한이 내게 세례를 주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그 무엇과도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엄청난 에너지 파도를 느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강물에서 나와서는 하염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앞도 보지 않고 광야로 계속 걸어갔다. 주목하라! 광야에서의 6주간은 내 인간 의식의 총체적인 내적 정화 기간이었다. 구태의연한 태도와 믿음과 선입견은 모두 해체되어버렸다. (38~41쪽)

-- 어린 시절 그리스도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민감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편모 슬하인 듯한 모친의 잔소리를 싫어하고 완고한 유대전통에 저항하는 청년으로 살다가 창조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열망으로 요한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줄탁동기 하듯 신 체험을 하였다는 것인데 책에는 엄청난 에너지 파도를 체험하고 "문자 그대로 경악했으며... 의식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으며... 찬란한 행복감과 황홀경을 느끼고... 거대한 빛을 의식했다."고 합니다. (40쪽) 그리고 나서 광야의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거기에서 체험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성경과 사람들이 쓰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란 말이 옳지 않고 구태의연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에 대신할 만한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이 점으로 인해 불교와 유교가 친근해진 듯합니다. 불교와 유교의 창시자들도 궁극의 실재에 대한 체험을 했으나 그것을 특정 용어로 고정시켜놓음으로써 초래되는 오류를 피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특히 불교는 힌두교의 신 개념을 철저히 버린 개혁된 힌두교로 보면 됩니다. 오늘날도 교회들이 사용하는 하느님이란 말에서 저는 성황당이나 칠성각과 같은 통속성과 상투성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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