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죽기 좋은 날

목운 2018. 2. 9. 06:54

제가 '학이시습'을 함께하는 동학(同学)이자 붕우(朋友)들이 모이는 페이스북 '그리스도의 편지읽기' 그룹에 제 삶의 지표가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란 확신이 들 때까지 훈련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다음은 그 말에 대한 주석입니다.


삶은 여정이고 그 여정은 이승에서 '곧고 좁은 길'을 끝없이 올라가는 일이라는 게 제 학습의 결론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근본 결단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결단은 '탐욕과 애갈'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게 '선가귀감'의 말씀입니다. 탐욕과 애갈을 지워낸 귀결은 생사를 벗어나는 것이며 다른 말로 초탈이며 이원성의 극복입니다.


그 경지가 바로 '죽기 좋은 경지'이며 그때 비로소 유교 최고 실천명제인 인(仁)과 서(恕)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과 서란 말 그대로 만물 만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인데 다른 말로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그 일은 인력으로 불가하기 때문에 복성서의 가르침대로 '불려불사(弗慮弗思)'를 통해 참나를 실현(復性)해야 합니다.


기독교 용어로 하면, 신애(神爱)와 인인애(隣人爱)를 끝없이 상호 대조해가며 명상과 기도가 뒷받침될 때 이 수련은 점차 향상하는 지루한 노정을 통해 구현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이 일은 인력만으로 불가합니다. 참나 또는 신 의식 쪽에서 주도권을 가지도록 섬세한 분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총이 필요합니다.


만물 만인에 대한 사랑은 차별과 예외가 없는 경지까지 가야 하기에 심지어 땅 속 벌레와 반대당 사람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물론 아직 힘들지만 목표는 그렇게 잡고 있습니다. 이 길에서 정치적 참여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은 세속에의 참여가 '십우도'의 입전수수(入廛垂手)가 시사하는 바의 대승적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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