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요령과 요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목운 2021. 10. 7. 08:23

제가 번역해서 가지고 있는 원고인데 목차와 머리말을 소개합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은 메일 주소 남겨주시면 보내드립니다.


[목차]

머리말

1부 : 그리스도교 신비
1장 : 평범한 눈에는 숨겨짐
2장 : 신비주의의 정의
3장 : 신비주의는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되는가
4장 :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진화
5장 :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비그리스도교 신비주의
6장 : 신비주의가 왜 중요한가
7장 : 신비적 역설
8장 : 그리스도교의 잘 숨겨진 비밀

2부 : 관조적 삶
9장 : 비움과 상호침투
10장: 성성(聖性)의 길
11장: 여정이 아닌 여정
12장: 신적 독서(Lectio Divina)
13장: 천상의 대화
14장: 언어를 뛰어넘는 기도
15장: 나무, 물, 포도주
16장: 신비주의의 정수

[머리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많은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에 잘 보존된 비밀이다. 그것은 신과 그리스도와 영성에 다가가는 혁명적인 길이다. 그것은 모험담이나 장편 영화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 지혜 전승이다. 그것은 신약 성서로 추적해 들어갈 수 있는 영적 가르침의 유서 깊은 전통으로서, 그 지혜를 자신의 외적 삶에 진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적용하려는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약속한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보통의 종교적 믿음이나 예절과 같은 게 아니다. 거기에는 깊은 의심과 끈질긴 질문에 대한 열린 공간이 있다. 그것은 문 앞에서 양심을 성찰해야 한다거나 교회든 신부나 목사든 책이든 간에 어떤 종류의 외적 권위에 승복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오히려 우리가 존중하는 외적 권위란, 신이 실체이며 현존한다는 심오한 내적 체험이나 확신에서 나오며, 보통 사람이 신과 참으로 체험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 가능하며 말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가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대체하는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종교란 그저 사회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표현된 영성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란 신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하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우리 인간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전망을 장려한다. 그러니 동네 교회처럼 조직된 종교 안에서의 일이라 하더라도 신비주의를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수단으로 생각하길 바란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초자연적인 보기와 듣기가 반드시 포함된다거나 자연적으로는 기적적이고 범위로 보면 초성적인 심오한 카리스마적 체험이 포함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다. 신비주의란 모든 가능성에 관한 것이기에 그런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오래되고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겸손, 의탁, 단순성 및 평안과 같은 가치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실로 완전히 평범하며 매우 실제적이며 전적으로 자연스럽다. 우리는 신에게 받는 비장의 메시지나 전혀 보는 것 없이도 신비가가 될 수 있다. 사실 십자가의 요한처럼 위대한 신비가들은 초성 현상이 문젯거리일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는데 왜냐하면 그런 현상들은 인간 에고가 중요하거나 특별하게 느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비신비적 목적에서 쉽사리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신과 그리스도, 교회, 우리 영혼, 그리고 죄나 거룩함 같은 것을 바라보도록 초대한다. 신비주의는 종교의 전통적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인간의 논리나 이성을 초월하는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은 표면적으로 세속적 경건성을 뒤집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 그것은 전복적이며 모든 것, 특히 우리가 간직한 믿음, 금기 및 교조적 환상에 흠집을 낼 가능성이 있다. 우리 모든 고정 관념이 타격을 받는 이유는 신비주의가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념이나 교조, 신학이나 철학이 파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 마음을 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이란 신을 말한다.


신비 체험의 모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관한 핵심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더 많이 드러날수록 더 많이 감추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신비, 즉 영적 신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말로는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없으며 이 주제를 다룬 책은 어느 것이나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모순되며 때로는 헷갈리거나 애매모호하다. 참으로 이런 혼란은 신비주의 자체가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는 데 기인한다. 신비 체험으로 우리는 신의 사랑에로 개방되지만 신에 관한 유한한 생각과 개념을 모두 버려야 한다. 즉 그것들은 모두가 마음에 있는 우상일 뿐이다. 깊이 들어갈수록 더 포착하기 어려워진다.
기도, 명상 및 묵상(역주 – contemplation의 번역으로 관조로도 번역함)을 통하여 신비주의를 탐구하기 시작할 때 신이라 부르는 희미한 신비에 서서히 응답하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현재 순간에만 존재한다. 내일 또는 내년, 아니면 다음 생에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쁘게 사는 것을 배우는 일, 의식을 변모시키는 일, 거룩하게 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세계에서 삶의 영적 차원을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방편과 수련법을 얻을 수 있지만 방편에 주의를 집중하는 순간 그것이 아주 가치 있거나 신통하거나 영적일지라도 신비 자체를 놓치게 된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대중적인 개념에서 보면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 사막의 은둔자, 산꼭대기에 독거하는 현인이나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난 은둔 여성을 떠올린다. 이렇게 봉쇄된 환경에서 그들은 행복하게 신과 함께한다. 그러나 20세기 유명한 신비가인 토머스 머튼은 삶을 바꾸는 대부분 체험의 하나를 수도원에서가 아니라 켄터키 루이스빌의 번화가 한 구석에서 겪었다. 14세기 위대한 신비가 노르위치의 줄리안은 사실 사회에서 벗어나 “세속적” 관심에서 떨어진 작은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사람들은 영적 조언을 들으려 그리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역주 - 남녀 구분 없이 3인칭 대명사로 사용함)가 매우 강력한 영적 체험을 한 것은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병상에 누워 고통 받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였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신과의 가장 놀랄만한 만남은 가난한 이, 병자 또는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동안 있었다고 했다. 신비주의는 손에 물을 묻히지 않도록 하는 게 아니라 험한 노동을 하도록 한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전적으로 체험에 관한 것인데 그 체험이란 신인합일 체험 또는 신의 현존 체험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 체험 자체를 허무는 영적 실체에 관한 것으로서 모든 가면과 자기 방어를 해체하여 ‘위대한 신비’의 침묵에 맞서 영적으로 발가벗겨지고 상처받도록 만든다. 그것은 천국을 땅으로 가져오고 천국에 이르기 위해 이 땅 위에 있는 동안 지옥을 통과하는 영성이다. 신비주의에 관한 많은 책이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안목에서 접근하지만 이 책은 신비 체험의 명료하고 독자적이며 아름다운 형태인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신비주의에 특별히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 신비 전통은 신약 시대와 초기 교회 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되고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위대한 신비가들의 삶과 말에 중점을 두면서 그 전통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주로 하는 다른 책과 달리 나는 현대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신비주의가 오늘날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신비주의와 묵상, 그리고 그리스도교 명상의 신비를 오늘날의 환경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신비주의에 관해 논의하기보다 독자를 변화시키고 신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하나의 실체로서 신비주의를 만나도록 초대하고자 한다. 우선 신비주의의 신비와 역설을 탐구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지혜가 독자의 삶에 실제 어떤 변화를 줄지 궁구하고자 한다.
그들의 믿음에 관해서 확실한 선(善)과 미를 깊이 이해하고 평가하는 일을 독려하는 방법으로서 위대한 신비가의 저작을 탐구하는 동안 그리스도인과 비스리스도인이 똑같이 그 지혜에 따라 살도록 영감을 주는 것이 보다 큰 내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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