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교와 학

목운 2023. 1. 4. 06:57

어제 아침 같은 시간에 자주 들르는 단골손님이 집안의 학벌 좋은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덩달아서 제가 받은 교육과 학습에 비추어 이 땅의 교육 풍토를 비판했는데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학(学), 공부 또는 수행이라 하는 것, 모두가 대학과 중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봅니다. 서양이 신 개념으로 수행의 궁극을 말했다면 우리는 천(天) 개념으로 그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 중용을 읽고 생각컨대 신 또는 천과의 합일체험에서 교(教)가 나왔고 그것을 종교 또는 수도라 한다고 봅니다.

삶의 모습이, 새옹지마 우화가 보여주듯 덧없는 '제로 썸'일 뿐임을 겪고나서 이목구비가 모두 질곡이니 한계를 모르는 완전한 자유, 궁극의 자유로 가는 길을 닦으려는 것이 교(教)요, 그 길이란 천명인 성(性)을 따르는 데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 중용입니다.

그와 같은 취지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말이 유가의 '종심소욕불유구'요 불가의 '출세자유인'입니다. 두 표현 모두 몸은 세간에 있지만 정신은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는 경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골프 레슨을 보고 들어보면 백 인이 백 가지를 말하는 것 같지만 목표가 같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 몸이 같기 때문에 모두 한 가지로 수렴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자유의 길도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한 가지로 수렴합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다양한 듯하지만 눈꽃송이처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중용은 천명을 따르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는 것, 즉 수도(修道)가 바로 교이자 자유의 첩경이라는 선언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도란 솔성이고 성이란 천명입니다. 성인이 되어 매순간 천명을 따르는 삶만이 자유로울 것입니다. 권력과 부를 통해 자유케 되려는 모든 시도가 오답임을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증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가 베풀어지는 학이란 바로 심학이 되어야 할 것이고 한국 유학이 모르거나 알고도 배제한 안회의 길을 가르치는 것만이 이 땅의 학을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스펙과 학벌로 변형된 학이 만연하여 사람들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안쓰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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