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목운 2019. 8. 28. 07:22

며칠 전 접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인용해 봅니다. "당신이 불완전성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뒤에도 당신은 전과 다름이 없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몸만 벗었을 뿐이다...

그저 죽음으로써 천사가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무엇이 되었든 이 다음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환생한다 하여도 똑같은 상태로 날 것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노력해야 한다. 세상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나에 대한 부모의 기대와 소망, 자식에 대한 내 기대와 소망을 숙고해 봅니다. 아마도 그것은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가난다 님은 그것을 천사로 표현했다고 봅니다. 존귀함의 드러남이 옛날엔 귀족이었다면 요즘은 고관이나 부자쯤 되겠지요!

그것을 위해 거의 모든 부모는 좋은 스펙을 추구하며 가만히 보면 문과는 법조인, 이과는 의사입니다. 과거 유럽도 다르지 않더군요. 하지만 맹자에 따르면 천작에 인작이 따라오게 해야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어지러운 것도 이것을 거꾸로 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러면 천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고 언제까지 노력해야 합니까? 제가 볼 때 천작이라 함은 '지어지선'이며 다른 말로 하면 최고선에 이르기 위해 쉬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악스러운 우리들은 이것을 뒤로 미룹니다.

제가 은퇴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채근담이 말하는 무명무위지락(無名無位之樂)을 추구하게 되는데 명예도 지위도 없음의 즐거움이란 바로 안회의 즐거움이고 안회의 '일단사일표음'의 즐거움이란 빈한함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매일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이라는 깨우침이 듭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평생 번역하신 탄허스님은 좌우명을 '향상일로'로 하셨으리라고 보며 오직 향상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에 새겨진 운명이 끝없는 진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진화만이 존재의 전부요 진화가 바로 창조입니다.

어쩌면 '하화중생'도 내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불가피하게 이뤄지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삶이라면 자리(自利)가 이타(利他)요 꿀벌이 본의 아니게 식물의 수정을 돕듯이 외부경제를 낳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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