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죽기 좋은 경지

목운 2019. 2. 8. 07:55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에 대해 똑같은 협주곡을 천 번 작곡했다고 했답니다. 저도 느끼지만 사계만 들어도 비발디 음악은 다 들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동네에 비발디 아파트가 있는 것처럼 아주 먼 나라 사람들의 현재 삶에까지 강렬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이곳에 쓰는 글들은 실상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것입니다. 즉 이 세상 삶은 물론 다음 생까지 잘 돌보고, 그래서 참 잘 살았다는 보람을 느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대한 답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란 확신이 들도록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합니다.

삶은 여정이고 그 여정은 이승에서 '곧고 좁은 길'을 끝없이 올라가는 일이라는 게 스승들의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이 길을 가려면 근본 결단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결단은 '탐욕과 애갈'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게 '선가귀감'의 말씀입니다. 탐욕과 애갈을 지워낸 귀결은 생사를 벗어나는 것이며 다른 말로 초탈이며 이원성의 극복입니다.

그 경지가 바로 '죽기 좋은 경지'이며 그때 비로소 유교 최고 실천 명제인 인(仁)과 서(恕)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과 서란 말 그대로 만물 만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인데 다른 말로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이것을 자유자재로 구현하려면 나와 남의 구분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 일은 인력으로 불가하기 때문에 복성서의 가르침대로 '불려불사(弗慮弗思)'를 통해 참나를 실현(復性)해야 합니다.

기독교 용어로 하면 신애(神爱)와 인인애(隣人爱)를 끝없이 상호 대조해가며 실천하되 명상과 기도가 뒷받침될 때 점차 향상하는, 어쩌면 지루한 노정을 통해 구현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이 일은 인력만으로는 불가합니다. 참나 또는 신 의식 쪽에서 주도권을 가지도록 하는 섬세한 분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총이 필요합니다.

만물 만인에 대한 사랑은 차별과 예외가 없는 경지까지 가야 하기에 심지어 땅 속 벌레나 나와 입장을 달리 하는 사람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물론 아직 힘들지만 목표는 그렇게 잡고 있습니다. 이 길에서 이웃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세속에의 참여가 대승적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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