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올바른 신애(神愛)의 길

목운 2021. 2. 17. 09:44

“너희는 또한 너희가 ‘하느님’이라 부르고 내가 ‘보편적 실재’라 일컫는 <그것>에게 여러 종교들이 덧붙여놓은 인간적 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그리고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분노와 위협, 처벌 등 인간적 속성은 오직 인간의 상황에만 어울리는 것이다.” (274쪽)

훌륭한 스승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제자의 수준에 맞는 용어와 비유를 썼습니다. 그리스도가 유대 신앙의 율법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 속성을 극복하고 가르침을 듣는 청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사를 구사하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정보화가 널리 퍼진 오늘날의 청중들이라면 예수 시대는 물론 중세 시대에 통했던 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정해서 알아듣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군주처럼 신을 상상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아직도 붙들고 있다면 퇴장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버지라는 말만 해도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유아들에게 신의 사랑이 무조건 주는 사랑임을 전하려는 뜻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아버지 신이 있으니 아들 신이 있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만들고 거기에 반대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처형해온 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동아시아에서 높은 의식에 도달한 이들은 저 ‘보편적 실재’에 대해서 이미 한 물건(一物)이라 칭하고 “그것은 본래 밝고 오묘해서 난 것도 아니고 죽지도 않는다.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전심법요)”고 한 바 있습니다. 수준 낮은 기독교도일수록 기독교 안의 유아적인 것과 감상적인 것에 심취되어 있습니다. 신을 아버지에 비유해 놓으면 어려서 아버지에게 지독한 징벌을 받으며 자란 아이에겐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존재의 진실, 보편적 실재 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과학과 철학이 더 정확히 말해놓고 있으니 거기에 있는 진리를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 한국 기독교가 극우의 온상이자 물신 숭배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존재의 근원에서 나온 우리 존재, 즉 영혼이 갈망하는 더 큰 소망은 지상에서 복락을 누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과 만나고 합일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275쪽).

보편적 실재의 도움을 얻어 지상 복을 많이 받고자 하는 데 매여 있는 것이 오늘날 종교들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근원과 만나고자 전심전력을 다해 공부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명상하는 일을 오히려 동양의 지성인들이 더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주희 선생이 반나절은 영적 독서를 하고 반나절은 고요히 앉아 있는다(半日靜坐 半日讀書)고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합일을 구하는 것이 바로 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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