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명상과 성성(聖性)의 추구

목운 2019. 7. 31. 07:48

일부러 을의 삶을 골라 살 필요는 없지만 세상 구조상, 그리고 각자 카르마에 따라 을의 체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을의 삶이라면 잘 인욕(또는 인내)하는 게 수행의 길입니다. 한편 교구의 주교보다 종지기가 더 성인이 되기 좋은 자리라는 말도 전해집니다.

직장에서 한번 혼나면 최소 48시간 의기소침해지는데 그때 오히려 더 철저히 공부할 자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삶은 카르마 상의 빚을 갚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 경우 그 가운데 가장 큰 과제는 나와 남을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자유케 되는 일입니다.

나와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함은 그와 나의 수많은 과오를 경멸심 없이, 이원적 판단을 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매사 현재 상태의 완벽함을 보고 따라서 아무도 용서하고 말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고의 이분법을 초월해서 신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하게 어려운 일이기에 평생이 걸리는 일이고 은총으로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에고가 죽어야 하는데 실상 이 길을 가서 뚜렷한 성취를 보인 신비가들과 학인들이 있기에 도전을 포기 않는 것입니다.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말년을 한미하게 보낸 경허스님은 바보 천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번역하다 보니 성성(聖性)과 관조의 길은 한편 바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인용합니다.

"독일어의 '어리석다(selig)'에는 '복받은(blessed)'의 뜻이 있다. 관조(contemplation)란 신과 신의 사랑을 위해 바보처럼 보낸 시간이다. 그것이 바보인 이유는 통제할 수도, 터득할 수도, 계획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로 명상의 길은 바보만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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