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 3

목운 2019. 12. 4. 14:30

영혼의 근저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모상(模相, image)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에크하르트는 그 '모상'이 인간 마음이나 지성과 같다는 주장이 그리스 합리주의 및 신플라톤 전통을 배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 강론(sermon 23)에서 지성이 우리 안에서 신의 모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말하길 그것은 '지금 여기와 떨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을 닮지 않았고', '순수하여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았으며', '활동적이며 그 자체 탐구적이다.' 고 한다. 실은 이런 특성들은 에크하르트가 신에 대해 말하는 용어에 매우 근접하다. 그리고 신성처럼 '모상'이나 '지성'은 천사보다 높고 '이름이 있다기보다 이름이 없는 쪽이며' '알려졌다기보다 미지의 상태다'(강론 3).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그것은 '단 하나의 일자성'이며 '신이 하나이고 단순한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이며 단순하고' '완전히 영적이다'(강론 13).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상-지성이란 본질적으로 초월적 일자의 통일되고 신적이며 영적인 영역에 속하며 에크하르트가 거기에 적용하는 많은 비유들(즉 '불꽃', '왕관', '요새', '영혼의 근저' 등)은 일자와 마찬가지로 개념화가 전혀 불가능하며 인간의 생각은 그것을 한정시키고 부인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몇사람이 에크하르트가 베단타 전승의 브라만-아트만 체계에서처럼 우리가 자아 안에 신의 '일부'를 담고 있다고 전제한다고 믿게 한 원인이 된 것은 에크하르트가 우리 안에 신의 모상이 있다고 한 아주 고상한 용어들 때문이다. 그러나 콜로뉴에서 1327년 2월 13일 제시한 변론에서 에크하르트는 신적 불꽃이 어떤 의미에서든 영혼에 '부가된' 무엇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조심스레 지적했다. 이 진술이 뜻하는 바는 에크하르트가 신적 모상을 우리 안의 잠재력(potentiality)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즉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영혼이 신과 하나임을 알 수 있게 되는 영혼 안의 초월적 잠재력인 것이다. 디트리히의 용어로는 신이 '마음'인 것처럼 우리 인간 본성이 '지성'이나 '마음'이며 '마음'의 본성은 존재를 초월한 일자성이라는 인식과 같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모든 '지성'은 하나이며 영혼과 신은 그 본질상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에크하르트가 우리가 신이거나 신과 비슷한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크하르트의 전 체계는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말할 필요도 없는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지상의 존재로서 우리가 육화된 상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 잠재력에 비추어 될 수 있는 것에 호소하고 있다.

 

에크하르트가 인간 마음과 신의 마음 사이의 초월적 대칭을 근거지우는 주된 방식은 그의 모상론을 통해서다. 이는 그의 강론 20의 주제이지만 그의 작품 전체에 걸쳐 두루 보인다. 모상이라는 그리스도교 개념은 원래 두 근원이 있다. 첫째는 창세기 1:26-27인데 거기에 인간은 신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고 둘째는 삼위일체 신학인데 성자가 성부의 '모상'이라고 주장한다. 그 의미는 성부가 성자를 낳았으나 둘은 같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쓰는 모상을 융합해서 에크하르트는 성부와 인간 지성 간의 동질성을 표현했다. 인간 지성은 신에게서 나왔지만 (잠재적으로) 신과 같다. 에크하르트는 한 모상의 출처는 그 모상 안에 온전히 있다고 한다. 그의 형이상학 용어로 그 모상은 그 근원 '안에' 있으며 그 근원은 모상 '안에' 있다. 그렇게 모상의 반복된 계기로 해서 에크하르트는 설혹 우리의 타락한 상태에서라도 우리 인간 본성 안에는 신과 아주 특별히 가까운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피조계 내의 그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