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고통을 극복하는 공부

목운 2019. 1. 2. 06:02

어제는 15년 전 돌아가신 제 부친과 동갑이신 장모님을 뵈러 동네 요양원엘 다녀왔습니다. 몸은 이미 유아상태와 흡사하게 되셨고 의식은 그저 이것저것 안부하시고 미안해하시는 마음만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을 전혀 알아보시지 못합니다. 아마도 기억이 다 지워지신 듯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진보했는지 어떻게 알아봅니까?" "얘야 전에는 화가 나던 일이 이제 웃음이 나지 않더냐? 그럼 나아진 게지!" 또 하나는 월쉬 책에서 읽은 것인데 깨달은 후에도 청구서는 날아오고 고통도 받지만 고통 없이 고통 받게 된다고 합니다. 요컨대 내면이 완전히 바뀌는 게 공부의 결과라는 것 같습니다.

어느 직장에서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피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나는 고통과 더불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고통을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불러들인 게 나요 그 사람은 내 거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카르마와 여정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공부가 안돼'라는 진심(嗔心)이 일어나지만 이 마음이 '공부란 농부가 같은 일을 묵묵히 정성들여 또 노고를 들여 하듯 매일매일 하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바뀔 때까지 그저 열심히 하고자 합니다. 특히나 마음 밭에 있는 돌멩이와 잡초를 열심히 들어내는 것이 공부라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 바탕이 완전히 바뀌어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친절할 수 있을 때 공부가 꽤 나아간 줄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겉으로만 그럴 듯하다면 임종을 앞두고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치매에 걸리면 진심이 남아 있을 경우 의심하고 소리치고 때리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행의 초점  (0) 2019.01.09
공부에서 느끼는 것  (0) 2019.01.08
우환에 삶이 있음(生於憂患)  (0) 2019.01.01
무위와 무지  (0) 2018.12.29
무위(無爲)와 무소주(無所住)  (2) 2018.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