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되기

9장 4

목운 2014. 11. 14. 07:32

 그러면 이제부터 '무한한 나'란 '무한한 장'에서 파동 주파수를 골라 인간 뇌에 다운시키는(뇌는 그것을 다시 시공 상의 입자로 바꾸어 "현실"로 내어놓습니다.) 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무한한 나'를 아주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화관 안에서 사용하던 다른 개념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무한한 나'는 "상위 자아"나 "확장된 자아"가 아닙니다. 상위 자아에는 두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위이고 하나는 자아입니다.

 먼저 "상위"란 판단이 담긴 말입니다. 판단은 영화관 안의 환상들을 합쳐주는 접착제입니다. "자아"란 말을 쓰면 우리의 자아가 상위 버전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실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무아(no-self)"입니다. "무한한 나"는 결코 우리가 확장되어 이루는 그런 게 아닙니다.

 '무한한 나'는 우리가  "진보하거나" "영적으로 되거나" "고양되거나" "정화되거나" "더 나아진" 그런 게 아닙니다. 또 "깨달았거나" "진화했거나" "거룩하게 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무엇가를 해서나, 많은 명상을 해서나, 유기농 음식을 먹거나, 기도를 하거나 무슨 예식을 통해서 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신도 아니고 만유도 아니고 알라나 여호와나 "근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초의식이나 객관 의식, 붓다 의식, 신의식, 그리스도 의식, 우주 의식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영화관 안에서의 개념이기 때문에 조금씩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당신의 의식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의식, 즉 자의식(self-consciousness)은 아닙니다. 

 비록 당신이 당신의 '무한한 나'와 지속적으로 소통하고(그것을 깨닫든 못 깨닫든) 있더라도 둘은 '무한한 장'의 다른 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비유가 달에 있는 우주인입니다. 즉 우주인이 당신이고 휴스톤 본부가 '무한한 나'입니다. 이때 우주 공간은 바로 '무한한 장'이고요. 내가 이 비유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신의 '무한한 나'가 당신을 달에 보냈을 뿐 아니라 그가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파트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한한 나'는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모릅니다. 내 경험으로 아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며 나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것은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똑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한한 장'의 이쪽에 있는 한 누구도 답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한한 나'와 소통한 바에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를 고향으로 데려다 줄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식 모델"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당신의 '무한한 나'가 '무한한 장'에 있는 무한한 수의 가능성으로부터 파동 주파수로 된 체험을 골라 당신의 뇌에 다운시킵니다. 당신의 뇌는 그 파동주파수를 받아 물질적 "실재"로 바꾸어 당신의 감각이 감지하도록 밖으로 내보냅니다. 당신은 그 홀로그램 우주가 "실체"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무한한 나'가, 당신이 체험하도록 당신의 뇌에 보내주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냄새맡지, 즉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과거 현재 미래에 체험한 모든 순간은 모두 당신의 '무한한 나'가 세세한 부분까지 조심스럽게 고른 것들입니다.

 외부 세계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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