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되기

15장 1 ; 초탈과 "무욕"

목운 2014. 12. 19. 07:39

 앞장에서 "초탈은 우리가 바라지 않거나 싫어하는 것에뿐 아니라 우리가 바라거나 좋아하는 것에도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비가 되려면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래놓으면 많은 이들에게 나비되기가 아주 재미없는 것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초탈에 대해 덧붙이자면 매사 그렇듯이 "초탈"이 아닌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초탈"은 때때로 "무집착"이나 "무욕"이라고도 하는데 영화관 안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변형되고 왜곡되어 그걸 시도하는 '인간 어른'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욕망에서 벗어나고 결과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초탈은 바하이교, 불교,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 자이나교, 카발라와 도교 등에서 중요한 원칙 또는 이상으로 꼽힙니다. 불교와 힌두교 경전에서 그 반대개념이 집착입니다. 초탈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의 집착은 평온하고 충만한 삶에 중대한 장애물로 여겨집니다. 다른 많은 영적 전통에서는 금욕을 못하면 욕망과 야망 때문에 걱정과 불안이 끊이지 않는다고 봅니다."

 "선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무집착입니다. 무집착에 대한 가르침은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무집착을 습득하는 것은 아주 핵심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망의 세상입니다. 모든 생물은 욕망으로 탄생하며 욕망의 조합으로 존속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욕망으로 태어났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난 이상 많은 것들에 매혹당하며 욕망이 샘솟듯합니다. 욕망을 통해서 집착이 생깁니다. 모든 욕망에는 그에 해당하는 집착, 즉 욕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 몸에 가장 두드러지게 집착합니다. 누가 몸을 위협하면 우리는 화를 내고 방어합니다. 우리는 몸이 편한 것과 감각의 즐거움을 좋아합니다. 결국 우리는 몸에 강하게 집착합니다. 그러나 이런 집착을 돌아보면 그것이 고통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개념이 통하지 않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거기에 판단, 즉 욕망은 "나쁘고" 무욕은 "좋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욕망에 대한 저항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무욕을 바라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욕망입니다.

 사실은 욕망에 "잘못"된 것은 없으며 거기에 저항하거나 욕망없이 살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욕망할 수 있습니다. 욕망으로 해서 삶이 재미있고 가슴뛰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그 욕망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때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욕망의 성취에 집착해서는 안 되며 그것의 성취 여부가 행복이나 마음 가짐에 아무 영향이 없어야 합니다. 떼어내야 할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 성취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는 붓다께서 이것을 알고 가르치셨으나 그의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의 결과보다 "욕망"을 금욕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위에 인용한 대로...

 "모든 욕망에는 그에 상응하는 집착, 즉 욕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집착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성취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고통은 욕망의 성취에 집착함으로써 옵니다. 그리고 명상과 기도, 시각화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욕망이 이뤄지지 않을 때 실망하는 데서 고통이 옵니다. 고통은 욕망 자체로 인한 게 아닙니다.

 "백일몽에 대한 모든 집착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그 에너지를 감정이라 부른다. 모든 감정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집착이다."

 나는 아직 집착하고 있는 몇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65피트짜리 날개달린 쌍동선을 만들어 대양을 항해하고 스쿠바 다이빙을 하고 돌고래와 사귀면서 나비로서 삶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욕망의 성취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무한한 나'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나는 그저 그 바람을 즐기고 꿈꾸고 설계도를 그리고 내 우주의 물결이 그쪽으로 흐르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볼 뿐입니다.

 

 "초탈에 대해 말하는 그 어떤 영적 가르침도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그들 누구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초탈의 감각을 기르라'고 합니다. 초탈의 감각이요? 도대체 어느별에서 온 사람입니까? 그들은 초탈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릅니다. 그들은 아마 당신이 가지고 싶은 BMW나 멋진 배우자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좋아하는 것에서 떨어지도록 하라! 당신의 존재상태에서 벗어나라! 인간으로 당신을 특징짓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그게 시작이라고."(제드 맥케나)


 아주 짧게 말해서 당신은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으로 인해 당신의 느낌이 영향받을 때 거기에 "집착"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행동이나 말이 당신의 행복이나 불행에 영향을 미치면 당신은 거기에 집착해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당신이 "올바르다" 느끼게 하기 위해 "올바라야" 한다면 당신은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정의가 에고의 거짓 꺼풀이라면 그 꺼풀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관심있는 초탈은 참된 우리에 대해 오해하게 만드는 이 꺼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탈은 우리가 영적 자기분해를 하고 우리가 아닌 것을 발견할 때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초탈을 추구하거나 연습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정체성의 거짓 꺼풀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찾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아닌 것을 찾을 때 우리는 그런 정체성들에서 벗어나 초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초탈입니다.


 "초탈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은 앞뒤를 바꾸고 있습니다. 초탈은 해방의 열쇠가 아니고 부산물입니다."(제드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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