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되기

12장 4

목운 2014. 12. 3. 19:17

비약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생각을 더 잘 전하기 위해 두가지 은유를 더 제시하려 합니다. 

 실은 하나는 이미 언급했지만 좀더 확장시켜 보려고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상상해 보세요. 운전은 '무한한 나'가 합니다. '무한한 나'는 버스를 운전하면서 동시에 길따라 경치를 온전히 즐기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며 그래서 연기자를 창조해서 의자에 앉아 경치를 즐기도록 합니다. 사실 '무한한 나'는 원하면 승객 모두를 창조해서 40가지의 관점을 가질 수도 있지요. (이게 놀랍다면 3부에 있는 26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운전석의 '무한한 나'와 객석의 연기자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선을 통해서 '무한한 나'는 각 연기자/여행객에게 홀로그램 영화를 다운로드하고 그것은 다시 승객의 창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승객은 3D 영화를 그저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경치와 영화의 일부로서 실제 참여하는 것입니다.

 각 승객은 자신의 창으로만 내다볼 수 있으며 따라서 각 승객은 완전히 독자적인 경험을 합니다. 보는 경치에 반응하고 대응행동을 할 때 승객은 선을 통해서 '무한한 나'에게 느낌을 보내며 '무한한 나'는 간접적으로 승객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승객의 일은 버스를 운전하거나 어떤 체험을 할지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저 체험을 하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승객은 운전자와 "분리"되는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한편 '무한한 나'가 자신을 확장시켜 창조했고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한한 나'에게서 분리되었다고 느끼는 게 "잘못"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게임이 그렇게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승객으로서 우리의 문제는 버스를 운전하려 했다는 것이고 어떤 경험을 할지 결정하려 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주로 우리가 과거에 "잘못되고" "불편하다"고 판단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며 앞으로는 그런 체험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버스 운전자의 일을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과거에 우리가 아주 좋아하고 되풀이하고 싶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승객으로서 자기 역할을 잘 받아들여 자기가 체험하는 경치에 대해 판단이나 믿음을 버린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 편히 쉬면서 탑승을 완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승객으로서 자기가 했던 반응과 대응이 "잘못"일 수 없음을 깨달으면 엄청난 안도감을 느낍니다. 버스의 승객으로서 겪은 모든 대응과 반응은 가치있고 바람직한 것이며 '무한한 나'가 원했던 것들입니다.



 두번째 비유는 내가 좋아하는 게임인 보물찾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위대한 보물찾기'로 하고 그것을 주된 비유로 쓸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게임'의 진수가 보물찾기이기 때문입니다.

 잘 짜인 보물찾기에서는 누군가 무언가를 숨기고 참가자가 알아낼 수 있는 힌트를 줍니다. 나는 그 게임에 홀딱 빠지는데 그것은 민감한 정신과 넘어야 할 장애를 잘 조합하고 어떤 경우는 보물을 찾는 데 육체적으로도 필요한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게임'에서는 그게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보물을 찾는 것이고 그 보물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했던 경험 모두가 게임을 위해 완전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수시로 힌트가 주어진다는 것과 그것의 의미를 모릅니다. 보물찾기 하는 동안 한곳에 머물러 다른 보물에 결코 다가가지 않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그 많은 재미를 누리지 못합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무한한 나'에 대해서 화를 냅니다. '인간 게임'의 전반에 드라마와 갈등, 아픔과 괴로움에 빠지게 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들이 잘 짜인 보물찾기, 즉 보물을 찾기 전에 힌트와 넘어야 할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즐기는 듯합니다. 아무도 우수한 보물찾기 디자이너에게는 화내지 않지요, 안 그런가요?

 내가 알기에 방어책 없고 도움도 없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아이로서 자신을 세상에 데려온 부모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무한한 나'에 대해서는 '인간 게임'을 창조했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화를 냅니다.

 "다 좋다, 하지만 나는 '무한한 나'를 위한 연기자가 되는 데에는 동의 못해"라고 할지 모릅니다. 또 "내 '무한한 나'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골치아픈 게임을 하느라고 내가 수년 동안 아픔과 괴로움을 겪는다는 데 동의 못해"라고 할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니 표면적으로 그럴듯 해보이는 이러한 분노는 판단과 비난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또 진리도 아닙니다. 당신의 '무한한 나'는 당신의 아픔과 괴로움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체험에 대해 당신이 저항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점은 나중에 더 얘기하지요.

 중요한 것은 이제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보물 봉지를 찾았고 열었습니다. 거기엔 쪽지가 있는데 "이건 실제가 아님. 그냥 게임임"이라고 써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상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지요.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일은 날아가는 것입니다. 보물까지 가는 길에서 당신은 수많은 보물 가방을 차지할 것입니다. 나비가 날기에는 너무 많고 무거운 것이 될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가방을 내버려야 합니다. 이 경우 그것은 이제까지 구축해온 성격, 즉 "자아(당신의 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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