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11장 - 종교에 대한 논박

목운 2017. 3. 18. 11:40

종교에 대한 논박

종교가 가진 도덕적 권위뿐 아니라 절대주의적 교의 때문에 종교는 역사를 통하여 주기적으로 적대적 극단주의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종교의 진리는 인간 에고가 그것을 잘못 쓰고 남용한 때문에 공격에 취약하게 되었다. 호전적 종교주의는 오늘날 세계에서 '신의 이름으로' 악용되는 것처럼 전쟁의 주된 근원이자 대량 파괴의 잠재적인 요인으로 만연하고 있다. 10에서 90(범죄 수준)으로 추정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적 권위를 가로채는 것은 다름 아닌 에고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사춘기 반항을 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인기에 호소하는데 바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대학들마저 소위 "맛이 간 교수들"을 초빙하여 가르치도록 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굴복한다.

억압적 권위주의와 실체에 기반한 권위를 구분하는 것은 분별의 문제이며 따라서 역시 맥락에 의존하는 것이다. 또 시민적 권리는 지향은 물론 환경에도 의존한다. 어떤 상황은 오직 의식 측정에 의해서만 확인되는데 의식 측정으로써 고정관념의 실제 핵심이 드러난다. 가장 자명한 사례로는 전시나 전염병 발생 또는 생존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로 인하여 제한을 하는 경우다.

이와 비슷하게 분별이 필요한 경우는 합리적인 자유와 무정부 상태 또는 극단적 자유주의를 알아내는 일이다. 자유란 부당한 억압에서의 해방이지만 합리적 범위(예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외치는 일) 내에서의 해방이다. 언론 자유가 합법적이라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자유 지상주의는 그러한 표지를 내던지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반동을 낳는다(예 KKK의 선동적인 어법). 그래서 자신의 자유를 존중하고 값지게 여기지 않는 자는 곧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유가 책임과 사회적 실체(시간, 장소, 환경 등)의 분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해방자 및 혁명가라는 평판이 있는 자들이 억압적인 독재자로 귀결하여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새로운 억압자가 된다(예,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휴고 차베스). 그리하여 균형의 원칙이 작동하게 되는데 그것이 다시 새로운 토론과 논쟁거리가 된다. 성공적인 해법은 논쟁자들의 측정된 의식 수준에 따르는 것이다.

논쟁의 변수와 균형을 정의하는 일이 필요한데 그것은 '관용'의 개념에 관한 오늘날의 사회적 대화 속에서도 알 수 있으며 관용이란 것은 효과적인 민주적 개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량 학살, 범죄 및 무고한 어린이에 대한 성적 만행을 포함한 터무니 없는 무절제까지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극단으로 갈 때는 잘못된 것이다(Dierker, 2006). 심리분석에서 이러한 성향을 '침략자와의 동일시'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이비 철학의 합리화로써 뒷받침되고 있다. 대안적으로는 동의나 지원 또는 감상적 동정 없이 야만적 침략자에 대해 동정심을 품을 수는 있다. 분별이 편견인 것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대등함'을 확립하기 위해 논에 피를 심을 필요는 없다.

이상의 논의에서 보면 모든 행동에는 과오의 가능성과 해명할 의무 및 책임성의 정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기능 장애'라는 말이 존재한다. 인도주의는 인간의 한계를 감안하며 따라서 융통성이 있지만 어리석거나 온정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하나의 행동에 과실이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심각한 사회적 제재 또는 심지어 죽음이나 전쟁으로 귀결되는 일도 있다.

2차대전 뒤 양측은 환경의 혹심함 때문에 상대편을 용서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으니 그것은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들이 테러 이념으로 깊이 세뇌된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결과다. 그러한 프로그램 때문에  독단적 신앙에 물들어 자살 폭탄차를 운전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동정심에는 사회적 실체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는 야생 호랑이의 모든 자연미를 좋아하고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호랑이와 안심하고 놀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실체란 본질의 결과이지 외양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악을 옹호하는 자는 카르마상 책임이 다양하다는 데서 오는 결과를 공유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이 짓을 왜 했다는 말인가?"라는 흔한 탄식을 참고하면 잘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신의 정의가 집단 문화와 국가적 재앙이란 방법으로 카르마의 법칙을 통해서 작용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즉 "네 머리의 모든 머리카락 수도 해아린다." [의식 지수 1,000]).

해결책
진정한 권위를 제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유아기와 사춘기에 고집과 자기중심주의를 포기한 것을 보상받는 이상 도움받고 사랑받은 부모와의 긍정적인 체험을 가졌는지에 의존한다고 흔히 말해진다. 훌륭한 부모는 잘 도와주고 지켜주며 동일시할 만한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제대로 된 해결책이 없으면 적대감이 떠나지 않거나 신을 포함해서 모든 권위나 그 상징을 미워하기까지 하게 된다.

때때로 소아가 참나에 승복하는 것은 재앙을 겪을 때뿐이다. 참나는 오직 영혼의 승리와 영적 실체의 큰 향상을 지향한다. 인간사의 과정에서 "인간의 극단은 신에게 기회다."라는 말이 성취된다. 그리하여 파멸적 재앙과 세상의 위기는 종종 역설적으로 구원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된다. 신은 두려움의 결과 찾아지는 게 아니라 그 두려움을 버렸을 때 찾아진다.

영예
우리는 우리 안에서뿐 아니라 타인 안에 존경할 만한 것을 영예로 여긴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영예로 여기며 신의 뜻에 바침으로써 모든 모습으로 표현되는 모든 생명을 영예롭게 생각한다. 에고를 포기함으로써 영은 존재의 고결함을 인식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명예심에서 참으로 책임을 지는 용기를 물려받고 평가하는 일은 물론 기사도(측정치 465)와 시골사람에 대한 존경심도 나온다. 자기존중에서 개인적 책임감은 물론 타인에 대한 존경심이 나온다. 영예는 자부심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며 그 핵심에는 겸손과 감사가 있는데 겸손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창조의 신성과 계시를 감지한다. 창조의 신성과 계시를 느끼는 순간 "지극히 높은 곳에는 신께 영광!"이란 외침이 나온다. [제11장 끝]

'실체,영성,현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2장 - 창조자인 신  (0) 2017.03.19
제12장(가설로서의 신)  (0) 2017.03.19
제11장 - 자율성  (0) 2017.03.17
제11장 - 진정한 권위라는 자산의 상실  (0) 2017.03.16
제11장 - 진리의 전도(顚倒)  (0) 2017.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