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영성,현대인

제11장(믿음, 신뢰, 신용)

목운 2017. 3. 12. 20:54

사회적 바탕 : 정보와 역정보

신앙, 믿음 및 신뢰는 미디어와 인터넷이 주된 무대(그 무대는 논쟁적 편견과 심한 왜곡으로 이루어져 있다)이기도 한 현대 세계에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이다(Kupelian, 2005). 세계 지도자들은 "유태인 대학살은 결코 없었다,"든가 "미국이 9/11 재앙을 일으켰다,"와 같은 공공연하고도 매우 거짓된 발언을 하고 공인들이 고의로 심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조사해 보면 대다수 외교관들과 국제 연합 회원들이 그렇듯이 많은 정치가들이 일상적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공공연히 지속적으로 상습적 중죄인과 어린이 학대자 편에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도 있다. 미국시민자유연맹이 어린이 강간 남색가와 어린이를 이용한 포르노물을 편들기도 한다. 뉴욕 타임즈는 명백하게 드러내놓고 또 아주 분명하게 치우쳐 있다(그 편집진은 200 미만으로 측정됨). 헐리우드는 선동적인 부조리를 뒷받침하며 미디어에 투자하는 이들이 자기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준 모국에 대항하여 반미 증오 선동(측정치 70)을 지원한다. (자신들이 스스로가 가진 증오심의 희생자가 되면서 증오를 옹호하는 모든 이는 200 미만으로 측정되는 것을 주목하시라.) 필경 거물 반전운동가들이 전쟁으로 수십억 달러를 버는 회사 주식에 수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어린이를 이용한 포르노물이 지방 공공도서관에서 '보란듯이' 무료로 제공되고 있으며 '언론 자유'는 거의 정신병 수준의 오류에 대한 내부교란자 구실을 하며 정형화된 얼빠진 변명거리로 악용되고 있다. 선동되고 자금줄이 든든한 일단의 거짓 노선이 오랜 동안 매일 늘어나고 있으며 혼란스럽게 체념하는 쪽으로 도피한 무감각한 대중이 거기에 수동적으로 합류하고 있다.


선동된 거짓을 고의로 공표하는 기법이 점진적이고 전문적으로 세련되었다. 한가지 전략으로는 의도적으로 극단적인 말을 함으로써 먼저 충격을 부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중이 그 계획에 거의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거짓 계획은 세심하게 준비되어 통제력을 얻으려는 악용자들이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하려는 미사여구다. 또 다른 계략으로는 나중에 인용되는 거짓 진술에 대해 '지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허수아비 때리기'도 흔한 수법이다.


오늘날 미디어의 포화는 예상되는 바대로 겨우 160으로 측정되는데 이는 미디어가 모든 진리가 그저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편견이라고 주장하는, 유행하는 철학 시스템에서 나오는 오류 투성이임을 뜻한다. 객관적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므로 왜곡되고 편협한 주관적 가치판단이 모두 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어서 종종 그런 주장들은 오직 반복에 의해서 진리라고 주장된 것을 듣는 사람이 믿게 하려는 표어(슬로건)가 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반역자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한 투사다."라는 유혹적인 말은 180으로 측정되며 교묘하게 오도하는 상대주의의 폐해이기도 하다. (요새 유명한 간첩과 체포된 반역행위자가 모두 80으로 측정되며 '자유를 위한 투사'는 200으로 측정된다. '테러리스트'는 30으로 측정된다.) 위와 같은 프로그래밍의 순수 효과는 진실 테스트를 위한 능력을 실제로 떨어뜨린다는 데 있다. 나아가 거의 모든 기초적 수준에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능력 자체에 실제 손상을 가져온다. 이점도 사회 비평가와 논평자들이 이미 주목하였고 기록으로 남겼다(Bruce, 2003; Klein 2007 등).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대한 합리화는 '윤리적 상대주의'(155로 측정됨)라 하는데 여기에서는 선과 악이 대등해진다. 하지만 인식론적 술책에 의해서 이런 식으로 선과 악을 뒤바꾸는 것이 '선'으로 간주되고, 이어서 전통 윤리가 '악'이 된다. 거짓이 유행이지만 그것이 155로 측정된다는 것은, 철학적 상대주의(측정치 190, 이는 주로 운용상 발생하는 지적 오류임)가 저지르는 것보다 진리를 더 심하게 해치는 것을 뜻한다.


믿음과 신뢰의 유지

거짓된 정보를 믿고 신뢰하는 대중의 성향은, 역설적이게도 순진무구, 믿음, 신앙과 신뢰가 여전히 강력하게 근원적으로 살아서 작동하고 있으며 실로 그 어느때보다 튼튼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상 순진한 인간성이란 바로 그 바탕으로 인해서 거짓이 그토록 강한 힘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순진무구한 수백만 명의 사람이 짓밟혀지고 무시무시하게 극단적으로 부패한 행동(예를 들면 무구한 여성을 서서히 참수하는 일이 세계에 방영되는 TV[측정치 10]에서 환호받고 과시된다.)에 자원하는 열렬한 젊은이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자기과시적 범법자가 가면 뒤에 숨어 있고 그 사이 옹호자들은 그 소동을 '자유를 위한 투사'나 '평화의 종교'(Spencer, 2005)라고 선전해댄다. 그리고 그들은 대중 최면을 이용해서 "미국에게 죽음을",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기독교도에게 죽음을", "유태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인다고 위협한다.) 그러는 사이 시민은 사회적(문화적) 파괴와 선동의 선구자를 '포용하라'는 훈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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