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윤집궐중의 실천

목운 2019. 12. 14. 08:59

제가 기회 있는 대로 종교와 언론을 비판하고 학교와 사회 탓을 하면서 그것들이 '되는(becoming)' 일에 정답을 찾아 가르치지도 실천하지도 않고 유사품에 만족하기 때문에 답을 못찾는다는 요지의 글을 자주 썼습니다.

우리가 유교의 세례를 받아 의식 무의식에 그 문화 DNA를 간직하고 있으며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영향을 듬뿍 받았음에도 그러한 정신들이 세상에서 득을 보는 일에 기여하는 데 그침으로써, 달리 말하면 그것들이 그저 지배 내지 통속(通俗)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그침으로써 (즉 이데올로기로 기능함으로써) 뚜렷한 한계를 체험하다 못해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시사했지만 그 이유는 가르침을 끝까지 철저히 제대로 실천하는 이들이 극히 소수에 그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깨달은 정답은 이미 맹자 고자편에 있습니다. 인용하면, "옛사람은 천작을 닦아서 인작이 거기에 따르게 했지만 오늘날은 천작을 닦아 인작을 구하며 인작을 얻으면 천작을 버린다. 그것은 순서가 뒤집힌 것이어서 끝내 망할 뿐이다. (고자상)"

천작을 끝까지 닦는 일을 유교 체계 전체에서 찾되 그리스도교 정신에 딱 합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하지대본인 중을 잡고(允執厥中) 그 상태에서 모든 덕을 베풀 뿐 아니라 '제가평천하'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가 요약한 신애(神愛)와 인인애(隣人愛) 계명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집궐중의 실천 방법이 우리 쪽에서는 정좌 내지 좌선이고 서양에서는 정관(靜觀, contemplation)입니다. 이 경지에서 체험되는 것을 장자는 좌망(坐忘)이라 하여 결국 매일 홀로 앉는 일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중용이 얘기하는 '신기독 수기중'도 바로 여기에서 도출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이 왜 꼭 필요한 일인지 알아서 실천하면 공부를 제대로 시작한 셈이라는 것 - 이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종교도 위에 지적한 것처럼 통속의 도구에 그칠 뿐 이런 것을 중시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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