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신애, 윤집궐중, 지관

목운 2019. 7. 9. 09:09
그제 명상시간 이후 최대 묵상거리는 '신 의식'의 화현이 되자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애(神爱)의 다른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동시에 바오로가 거론한 쉬지 않고 기도하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중용 또는 중도를 잡기 위한 선행조건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중(中)을 잡는다(允執厥中) 할 때 중에서 벗어나면 과(過)하거나 못 미치게(不及) 되는데 따라서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중에 머무는 것이 바로 신 의식에 일치한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종교와 통속을 같은 꽈로 보며 기독교가 '모든 경전의 정신이 신애와 인인애'라 하신 예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신애의 길은 대승불교에서는 지관이요 기독교에서는 렉티오 디비나와 쉼 없는 기도를 통해 성령과 하나 되는 데 있다고 보는데 두 길은 실천적으로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에고로 에고를 다스리려는 것은 오답(以情止情, 是乃大情)이니 꼭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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