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수양의 핵심인 중화

목운 2018. 11. 2. 05:16

판사인 얼벗님 글에 댓글 달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양승태 사법 농단에 대해 판사들의 의견이 갈리는 모습은 세상의 모든 사안에 대해 사람들 의견이 갈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과오를 저지를 수 있지만 특정 사안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초탈한 판단을 내리려면 수양이라 할 것도 없이 평소 철저한 자기반성의 삶을 살아야 하지 싶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거나 다른 사람을 관찰하면 어떤 상황에서나, 자기 위주의 비양심적 방향이 아니면  진실 위주의 양심적 방향으로 선택을 요구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자기 생각이 어디로 기우는가에 따라 비양심적 결론 또는 양심적 결론으로 나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초기 조건의 민감성 원칙에 따르면 우리 선택에 따라 도달하는 지점은 3차원 세계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지점이 되는 것처럼 인간사에서는 양심-비양심 또는 초탈-집착에 따라 상극의 결론에 이릅니다.

바라건대는 양심적인 판사들 숫자가 더 많아지기를 기원하며 직장이나 집안에서 제 자신부터 더 철저히 수양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제 오랜 경험도 그러하지만 이고 선생에 따르면 에고로 에고를 다스리는 일은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에 희로애락이 끊어진 자리인 중(中)을 지키는 일이 긴요합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중을 지키는 일의 핵심이 경(敬), 곧 명상이라고 보고 실천했습니다. 그때 얻어진 초탈의 습성으로 매사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을 화(和)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중과 화를 실천한다면 이론상 그 세상은 대동세상이면서 지상 천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덕경과 '대학'  (0) 2018.11.17
죽는 순간의 의식이 중요하다  (0) 2018.11.05
종심소욕불유구  (0) 2018.10.23
자신을 용서하는 법  (0) 2018.10.20
참나 실현과 구원  (0) 2018.10.18